난 아직도 진보 보수를 넘어 제3의 길을 꿈꾼다(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씨가 9년 만에 시 3편을 월간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했다. "소설은 앞으로 더 쓸 수 없지만, 현재 발표하지 않은 시가 60여 편 있고, 시는 얼마든지 더 쓸 것"이라고 밝힌 작가는 "감각과 감수성은 아직 젊은이들과 똑같다. 시력이 나빠져 책은 못 보지만 밤중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시작(詩作)에 몰입하다가 최근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정기 건강검사를 받기 위해 상경한 원로 작가는 본인의 몸보다 한반도의 생태계를 더 걱정했다. "우리가 지하수를 마구 빼냈기 때문에 실개천이 모두 말라가고 있다"고 한 노작가는 "인체의 실핏줄이 말라가는 것과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생태학 지식을 담은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졸졸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환경을 생각해야지. 그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체험해야 진실이 나오지…."
―총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청계천 복원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내셨던 선생님께서는 대운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정부가 물류를 위해서 추진 중인 대운하 건설은 절대 반대예요. 우리 강산이 만신창이가 될 겁니다. 옛날 (경남) 통영에는 기선이 다녔지만, 이제는 다 육로로 다닙니다. 운하 건설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물길 잇기'를 강조하셨는데, 만약 물길을 살리는 운하 건설이라면 찬성하시나요.
"강바닥에 콘크리트 깔고 산을 뚫는 운하 건설은 한반도를 죽이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지금 절실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직면한 '물전쟁'에 대비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지하수를 다 빼먹어서 실개천이 전부 건천(乾川)이 됐어요. 인체의 혈맥에 해당하는 실개천을 살리기 위해 '물길'을 잇는 사업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반드시 자연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해야 합니다. 저는 옛날부터 우리가 물을 수입해 먹더라도 지하수를 고갈시키면 안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지하수는 우리가 급할 때 먹기 위해 비축해 둬야 합니다. 그러니 물이 흐르게 해야 생태계도 복원하고, '물전쟁' '곡물전쟁'에 대비할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평소 '환경 관광'을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우리 땅에는 아담하고, 앉으나 서나 보이는 산이 많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현명한 위정자가 이걸 살려야 합니다. 강산을 살리는 환경 관광은 가능성이 많습니다. 코스타리카 같은 나라는 자연환경으로 먹고살잖아요. 환경 관광은 인류의 욕구입니다."
―청계천 복원 사업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을 자주 만나셨을 텐데, 새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에는 만나지 않았고, 복원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만난 적은 있어요. 카리스마는 없어 보이지만, 가면을 쓰고서 사람을 만나는 정치인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가면을 쓰지 않은 정치인은 참으로 보기 드물잖아요. 이명박 대통령이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은 다 아니까, 거기에 반드시 '생태'를 염두에 두고 부지런하길 바랍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몇 점 주시겠습니까.
"우리(국민)가 성급해서도 안 되고, 그쪽(정부)도 초조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넉넉하게 기다려 봅시다."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됐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건국 60주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난 60년 동안 고생 끝에 우리가 풍요를 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풍요가 우리를 죽이는 흉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에 국한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구촌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환경 문제가 심각합니다. 저도 한때 민족주의자였지만, 넓게 보면 민족주의는 지구촌에서 지역이기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좌편향 시각의 역사교과서에 맞서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최근 냈습니다. 이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보수 간 논쟁이 재연되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 진보적인 한 작가가 우리 집에 찾아왔기에, 시대 유행에 뒤처지는 짓 그만하라고 했어요. 진보와 보수가 그동안 이룬 공로와 해악이 모두 똑같아요. 해방 이후 지식인들 중에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창조적인 생각 없이 배운 것을 되풀이해 왔습니다.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지식인들은 권력의 시녀 역할이나 했잖아요. 지식인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넘어서는 새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합니다."
―새 이데올로기는 '녹색'을 표방하는 겁니까.
"자연이 인간의 근원이라면, 생명의 하나인 인간도 자연입니다. 그러니 자연과 자연이 합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섭리입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어요. 환경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후진국이에요. 몇몇 정치인 중에는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이 있던데, 저는 그들에게 기대를 겁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이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새 정부의 일부 장관 후보자가 재산 형성 문제 때문에 사퇴하는 가운데 '강부자(강남 땅부자)'라는 새 유행어까지 생긴 것을 아십니까.
"탤런트 이름은 알아도 강남 땅부자를 뜻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강남 부자라고 해도 다 괴로움은 있을 겁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에, 사람 이름이 그 제목인 소설이 있는데, 지금 내용만 기억나는 작품이 있어요. 어느 관리가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고서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돈을 모아서 숨겨놓고는 돈이 나날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이 자기 돈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공황 상태에 빠진다는 소설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1846년에 발표한 단편 '프로하르친씨'를 말한다.)
―선생님께서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 3편 중 '어머니'라는 시는 매우 개인적인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면서도 결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꿈을 '불효막심의 형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뱄을 때 흰 용이 방을 차고 들어오는 꿈을 꿨답니다. 파란 눈알이 박힌 흰 용을 본 태몽이기에, 아들을 낳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딸로 태어난 제가 어머니께 불효 많이 했어요. 오늘 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박경리씨는 요즘
소설가 박경리씨는 최근 식중독에 걸려 며칠 고생했다. "고향 통영에서 보낸 가자미가 상한 줄도 모르고 먹었다가 탈이 나서 한참 고생했어요" 담배를 아직 끊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건강한 그는 "시가 무심하게 찾아와 며칠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라며 "그 '생소리'를 마음속으로 만져 시를 만든다"고 시창작의 즐거움을 밝혔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 소설 이외에 틈틈이 시집 3권도 낸 박씨는 지난 2003년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이후 소설은 더 못 쓰겠다고 한다. 1999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한 이후 처음으로 신작시를 내놓은 박씨는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1958년)을 받는 등 이 문예지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은 후배 작가들에게 집필실을 제공하고 있다. 집필실이 없어 토지문화관을 애용했던 소설가 은희경씨는 지난해 동인문학상(상금 5000만원)을 받았다. "얼마 전 은희경씨가 300만원을 기부하고 갔어요. 참으로 고맙고 대견해요"라며 박씨는 후배 작가의 성의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