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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서가, 그 울창한 사유의 숲과 만나다

앤 셜 리 2011. 8. 12. 15:19

김삼웅의 서가, 그 울창한 사유의 숲과 만나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다.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일했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 제주4·3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친일파 인명사전 편찬부원장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애쓰고 있다. 저서로는 『친일정치 100년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백범김구전집』(전12권 공저) 등이 있고,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등을 선보이며 한국형 평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상웅 선생의 집에 들어설 때면 항상 부러움에 사로잡힌다. 벌써 몇 차례 그이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그 부러움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한 개그맨의 유행어를 빌려 말해보자면 “김삼웅 선생 댁에 가봤어요.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나 할까. 읽는 것보다 모으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얼치기 장서가인 내게, 2만여 권의 책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삼웅 선생의 서가는 그야말로 별천지다. 남한강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서가는 책으로 쌓은 성채(城砦)와도 같다.

 

여유당과 단재를 사숙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김삼웅 전 관장은 『여유당전서』를 내밀었다. 1936년 정다산의 외손자 김성진과 정인보, 안재홍 등이 154권 76책으로 간행한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일주일에 두 번은 어김없이 헌책방을 순례하는 그이가 20여 년 전, 서울 변두리의 한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다. 일본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터라 당시로서는 고가를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정다산의 꼿꼿하고 검소한 생활이 그대로 보존된 생가 여유당(與猶堂)과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묘소 지척에 그이가 생활 터전과 서가를 마련한 것은, 단지 우연만은 아니니라. 김삼웅 선생은 한마디 덧붙였다.

“평생 20권의 평전을 저술하려고 하는데, 그 마지막 작업이 정약용 선생 평전이 될 것 같아요.”

『여유당전서』와 함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론』(1946)과 『을지문덕』(1955년)을 내놓았다. 이제는 어느 고서점을 가도 손에 쥘 수 없는 귀한 책들이다. 2005년 『단재 신채호 평전』을 저술하기도 했던 그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 당시 『단재 신채호 전집』(전10권) 발간을 주도했다.

이 전집에는 신채호 선생이 중국 베이징에서 발행한 잡지 <천고>가 수록되어있다. <천고> 2호는 베이징 현지에서 김삼웅 선생이 직접 발굴했고, 북경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3호는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을 파견해 꼼꼼히 기록해와 전집에 포함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단재 신채호 전집』은 단재 연구를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큰 활력소가 되었다고 역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인생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침, <사상계>

김삼웅 선생은 10대 후반부터 <사상계>를 읽으며 비판의식과 정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사상계>야말로 내 인생의 스승이요 정신의 지침이었다”고 고백한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사상계>는 정론지로서 늘 진리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당시 청년 학생들은 <사상계>를 통해 역사의식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사상계>는 민족의 진로를 늘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그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사상계>가 제시한 국제정치를 읽는 세계적인 안목은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김삼웅 관장은 그 시절 <사상계>, 낡아서 표지가 바스러진 옛 책들을 보며 회상에 잠겼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지식인이라면 <사상계>를 읽었어요. 그 방향과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상계>의 가장 영향력은 사상과 이론이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항상 실천하는, 행동하는 지성상을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장준하 선생과 <사상계>를 지금도 제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야당지인 <민주전선>과 <평민일보>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 주간으로 일하며, 때론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그의 강단은 <사상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사상계>를 통해 세상의 문리(文理)를 깨치던 10대 시절을 훌쩍 지나 자신의 인식의 근간을 형성한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도 그를 못 잊어 ‘장준하 평전’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9만 7천 명, <오마이뉴스>가 개인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 이처럼 많은 네티즌이 방문한 적이 없었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표(師表)를 찾을 수 없는 시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장준하 선생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삼웅 선생은 “불의한 집단에 발 딛지 않고 평생을 살게 해준 힘이 바로 <사상계>”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쇼비니즘적 지성이 아닌 열린 지성을 지향한 <사상계>는 부산 피난 시절 창간된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의 진보적 저서들의 소개는 물론 저자들과의 인터뷰도 수록했을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김삼웅 선생은 1970년 5월호, 그러니까 김지하의 <오적>이 수록된 책만 빼고는 <사상계> 전 권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공안기관이 사상검열을 이유로 가져가고는 이제까지 반환하지 않는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정명을 지킨 잡지 <기독교사상>

김삼웅 선생은 <기독교사상>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사상계>와 함께 시대를 밝힌 잡지로 주저 없이 <기독교사상>을 꼽았다. 매달 사서 읽다보니 때론 빠지는 것도 있을 터, 그때마다 헌책방에 달려가 목마름을 해갈했다. 그는 <기독교사상>을 이렇게 평가한다.

“소수의 양식 있는 사람들, 도처에서 엄혹한 시기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는 잡지였죠.”

그는 지금도 <기독교사상>을 정명(正名)을 지킨 잡지로 기억한다.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특집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교회의 참모습과 참뜻을 밝히 알리는 것에도 열심이었지만,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광야의 소리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는 것이다.

김삼웅 선생은 “<기독교사상>이 600호를 넘기면서 우리 사회의 올곧은 소리로 자리매김한 것은 내부 편집자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뜻있는 필자들을 발굴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그들이 제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수많은 잡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명멸하는 요즘 세태에 50년, 600호를 이룬 것만으로 <기독교사상>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기독교사상>이 앞으로 50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내며 이 시대 지식인들의 지적 보루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독교사상>은 기독교적 뿌리를 든든히 할 뿐 아니라 정도를 걸으며 의로움을 추구했던 양심 세력을 추동했고 수용하는 능력이 있었어요. 앞으로도 끊임없이 필자와 독자를 발굴하면서 노골적으로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들에게 우리 시대 잡지가 마땅히 가져야 할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는 <기독교사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그는 1975년에서 1976년 사이 <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일한 바 있는데, 이 시기 <씨?의 소리> <뿌리 깊은 나무> 등은 그의 사상적 기반을 다져준 원동력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굵직한 족적들을 남긴 잡지들을 통해 그는 인식의 토대를 마련했고, 지금도 그 토대 위에 두 발 굳게 딛고 서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책을 통해 지식인의 삶의 전범을 수혈받다

청년 김삼웅은 『백범일지』를 탐독했다. 그 어떤 권력과 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백범은 청년 김삼웅에게 정의와 민족사랑, 지도자의 의지를 가르쳐준 스승이다. 그에게 백범은 거대한 산맥이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백범의 사자후는, 비록 직접 듣지 않았다고는 하나 청년 김삼웅의 마음을 두드린 울림으로 남아 있다.

『백범일지』에서 비롯된 백범에 대한 흠모는 평전 저술로 이어졌는데, 그가 쓴 『백범 김구 평전』을 일러 리영희 선생은 “백범이라는 인간의 자연인, 혁명가, 정치인, 또한 교육자와 ‘문화주의’ 신봉자로서의 면모가 총체적으로 약연하게 드러나 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혁명가, 독립투사로만 백범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교육자적 자질과 정신과 이상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완강한 민족주의자로만 이해하는 이들에게 민족의 장래와 구가의 미래로 문화·예술·평화의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 온 백범의 생애와 사상을 전해 준다는 것이다.

1970년 함석헌 선생이 창간한 <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일한 바 있는 김삼웅 선생은『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바른 역사관을 세웠다고 말한다. 함석헌 선생을 “사가의 안목과 문사의 필력을 갖추고, 지사의 의기와 무인의 용기로서 불의와 우상과 폭력과 싸운 사람”으로 평하는 그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교과서와 참고서에서 배운 친일적 사관이 배제된 진정한 한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배웠다고 회고한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세계 역사 속에서 한국 민족과 그 역사의 의미를 묻는 독창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민족분단의 책임을 외세에 돌리지 않고 민족정신의 부재에서 찾았던 함석헌은 민족 문제를 떠나 평화와 생명을 말한 적이 없다. 함석헌 선생의 민족에 대한 이해와 평화, 그리고 생명 사상은 오늘의 김삼웅을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래서 한때 이런 마음도 품었다고 한다.

“지금 돌아보면 오만한 생각이지만, 젊었을 때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30분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죠. 그만큼 절박한 현실의 문제가 있었고, 그것에서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겠죠.”

한편으로는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표상을 가르쳐준 단재 신채호의 저작들을 읽으며 군부독재에 맞설 용기를 얻었다. 단재의 사관을 그 자신의 사관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역사의식을 삶의 지표로 삼던 시절이었다.

『역사를 위한 변명』『봉건사회』 등을 선보이며 선구적 역사가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저작들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던 중국의 역사적인 과도기에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루쉰의 저작들은 김삼웅 선생에게 마음의 위로와 삶의 용기를 주는 책들이다. 그는 두 사람에게서 “고난에 대처하는 삶의 용기를 배웠고, 지식인의 삶의 전범을 수혈받았다”고 말한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지금도 틈나는 대로 읽는단다.

 

한국형 평전의 새로운 전기 마련

김삼웅 선생은 1996년 『박열 평전』을 시작으로, 2004년 8월 『백범 김구 평전』부터 본격적인 평전 저술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늘에 걸맞는 시선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이미 『단재 신채호 평전』과 『심산 김창숙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을 선보였다. 올해 1월 말이면 ‘안중근 평전’이, 4월이면 <오마이뉴스 >의 연재를 끝낸 ‘장준하 평전’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양심세력을 대변했던 <사상계> 창간이 1953년 4월이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기자로 일했으니, ‘장준하 평전’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된 셈이다.

7월에는 사법살인 50년을 맞는 ‘조봉암 평전’도 내놓을 예정이다. 독립기념관장 직을 내려놓기 무섭게 각종 자료 뭉치에 매달린 결과물들이 빛을 보는 것이다. 그의 평전들은 외국 인물들에 대한 평전만이 각광받는 세태 속에서도 “한국형 평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지금은 위인전도 다양하지만 내 어린 시절 때만해도 특색 없는 위인전밖에 없었어요. 천재성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강직했다 등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내용들 때문에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인물인데도 거리감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의 진면목은 사라지는 거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에 대해 거리감을 갖게 된 주된 원인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는 위인의 풍모가 아니라 ‘인간 냄새나는 우리 선배들의 일상’을 평전을 통해 전해주자는 것이 김삼웅 선생이 가진 평전론이다. 하지만 그가 고군분투하며 한국형 평전을 선보이고 있지만 세간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체 게바라나 등소평 등의 평전에는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언론들이 국내 인물 평전에는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나 등소평에 비해 백범과 단재의 활동은 물론 철학과 지식, 역사관에서 모자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일제의 잔혹한 침탈과 압제를 생각하면 오히려 점수를 더 줘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반응은 차갑기만 합니다. 학계와 언론계가 외세지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끔 지식인들의 식민지 근성 혹은 변방의식이 작용한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빛나는 20명의 평전을 써보리라 작정한 것이 7월에 나올 ‘조봉암 평전’으로 꼭 10권이 된다. 숱하게 반복된 투옥과 출소, 그 와중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침저녁으로 심장약을 먹어야 하는 그로서는,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의 글과 마음가짐을 평생 사숙(私塾)해 왔기에, 그들을 닮고자 하는 노력과 그들의 가르침을 체화하고 육화하고자 노력했기에 감히 그들의 평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빛나는 가르침과 삶의 유산을 달라진 오늘날에 맞는 옷으로 입히고자 하는 시도를 누구라도 해야지 않겠는가.

 

울창한 사유의 숲을 거닐다

김삼웅 선생은 한평생을 책과 씨름하며 우리 시대 지식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 길을 선배들에게 물었고 삶으로 옮겼으며, 다시 그들의 삶을 평전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2만여 권이 빽빽이 들어찬 그이의 서가는 그 자신의 삶을 잉태한 곳이면서 정신을 이룬 울창한 숲이기도 하다. 또다시 그의 서가를 찾아갈 때는, 지나간 미래인 숱한 책들과 조우할 뿐 아니라 그 울창하고 풍성한 사유의 숲을 거닐어 보고 싶다.

 

글_장동석 | 사진_류정호

 

 

기독교사상 2009년 2월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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