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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의 어머니를 추억하며

앤 셜 리 2021. 4. 3. 20:30

"신지식 선생님 소식을 듣고 싶어 방문했는데 돌아가셨군요. 날짜를 보니 첫 기일이 얼마 전이었네요. 어린 시절 잔잔하게 제 마음을 울렸던 동화책 선생님, 저에게 순수하고 해맑은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세요."

한밤중,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블로그 방문자 게시판에 누군가 글을 남겼다. 지난해 3월 12일, 만 90세로 세상을 뜬 신지식(申智植) 선생은 1960~1970년대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계의 '별'이었다. 1973년 2월 한 일간지 국내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그의 소설집 '하얀 길'(1956)이 1위로 2위인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앞지르고 있다.

그의 부고를 들은 소설가 김훈(73)은 "신지식의 글들은 짓밟히고 배고팠던 내 소년 시절의 위안이었다. 내 소년 시절에는 신지식의 '하얀 길'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있었다"고 추모했다.

김훈의 딸뻘인 30~ 40대 여성들 사이에서 신지식 선생은 "'빨강머리 앤'의 어머니"라 불린다. 그는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소설 '빨강머리 앤'을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했다. 이화여고 국어 교사였던 1960년대 초 헌책방에서 우연히 본 일본어판 '앤'을 우리말로 옮겨 이화여고 주보(週報) '거울'에 연재했다. 1963년 정식 출간, 창조사에서 모두 10권 분량으로 냈다.

2014년 3월 18일 서울 자택서 신지식 선생을 인터뷰했다. "왜 '앤'을 번역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정말로 절망 같은 시절이었으니까. 6·25 직후라 부모 잃은 아이, 집 없는 아이… 불행한 학생들이 너무너무 많았어요. 그들에게 부모가 없는데도 발랄하고 상상력 풍부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앤'의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어요."

전쟁을 겪은 적 없는 젊은 세대가 '앤'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역시나 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온갖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기품을 유지하는 자세. 부자들이 걸친 다이아몬드를 부러워하는 친구에게 앤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설령 평생 다이아몬드의 위안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야."

일본 에세이스트 스가 아쓰코가 어린 시절의 독서를 회고한 '먼 아침의 책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여자아이에게는 책 몇 권이 인생의 선택을 좌우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빨려들 듯이 책을 읽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자신이 없는 만큼 책에 빠져든다. 그 아이 안에는 책의 세계가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몇 층으로 겹쳐 솟아나고, 아이 자신이 거의 책이 되어버린다."

어린 날의 책 읽기가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은 대개 어른이 되면서 현실에 더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고달파 비굴해지고 싶을 때, 어릴 적 그 책 속 주인공을 따라 하며 내면화해 놓은 삶의 자세가 최후의 품위를 지켜주는 보루가 되는 경험을 종종 한다.

'앤' 외에도 어린 날 읽은 많은 책의 역자가 '신지식'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름이 '신지식(新知識)'인 걸 보니 엄청 똑똑하겠지?' 궁금증을 낳게 했던 분.

인터뷰 이후에도 몇 번 선생을 뵈었다. 이 말이 유독 기억난다. "곽 기자를 만난 후 '훌륭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야 빛을 본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계몽사 창업자 김원대 선생이 어린이책 번역 의뢰를 그저 아르바이트라 여기며 내심 귀찮아하던 내게 늘 하시던 말씀이었는데…."
기고자 : 곽아람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