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가족 이야기

이 아이들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앤 셜 리 2022. 3. 21. 12:05

24개월 전, 조카가 태어났다. 아이의 할아버지는 아이의 뒷모습 사진을 문자로 보내며 말씀하셨다. "유주가 바다라는 단어를 배운 곳". 사진을 다시 보니 바다였다. 아이가 있는 곳은 해변이었고,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바다에 간 유주'라고 하지 않고 '유주가 바다라는 단어를 배운 곳'이라고 하셔서 기억에 남았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다'라는 단어는 비로소 바다를 만나 완전해지는 것이다. 아닌가? 바다라는 대상은 '바다'라는 단어가 있으므로 안전해지는 건가?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들을 배워나가는 일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평면이었던 세상이 입체가 되고, 내가 그 세상을 이룬다는 깨달음도. 그래서 아이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고 하나 싶었다.

종종 그 사진을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있기라도 한 듯 그 장면을 떠올려본다. 밀짚모자를 써서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활짝 웃고 있을 것 같다. 워낙 잘 웃는 데다 주변 만물에 활달하게 반응하는 아이라서 그렇다. 조카를 보면서 아이의 웃음과 웃음소리가 얼마나 세상을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웃음과 웃음소리가 태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궁금했다. 마음이 유달리 깊은 아이의 할아버지가 상상력을 발휘하신 건지 아니면 정말 아이가 바다에서 '바다'라는 단어를 배웠는지. 유아의 발달 단계에 대해 모르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벌써 바다를 안다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정말 '바다'라는 단어를 배웠다고 했다. 동화책에서 보던 바다를 실제로 본 아이는 감격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바다가 보고 싶다 했고, 어떤 날에는 바다가 그립다며 울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바다…바다…바다…"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바다'라는 글을 그냥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다. "도쿄의 미타카 집에 살던 무렵에는 매일같이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 아이의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이 아이는 결국 바다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박성민 엮고 박성민 옮김, '봄은 깊어', 시와서, 2022) 일본도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폭탄이 떨어졌고, 사람이 죽었다. 그로 인한 이야기를 다자이 오사무는 '바다'에 쓰고 있다.

바다가 그에게 특별했기 때문이다. 쓰가루 평야 한복판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는 게 늦어, 열 살 무렵 처음 보았다고 한다. 그때의 흥분이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라며, 자신의 아이에게도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썼다. 그의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얼마 있다 미타카 집이 폭탄으로 무너진다. 다친 사람은 없다. 아내의 고향으로 간다. 다시 습격을 받아 집이 타 버린다. 전쟁은 여전하다. 결국 고향인 쓰가루로 가기로 한다. 거기가 자기네 가족이 죽을 마지막 장소라며. 운이 좋으면 살겠지만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런 것이라고, 다자이 오사무의 이 짧은 글을 보며 느낀다.

지금 이런 비감(悲感)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게 된 아이들 사진이 있다. 전쟁에 나가는 아버지가 아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우는데 의연한 아이,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채 장전한 총을 들고 창문 옆에 서 있는 아이, 마스크를 쓰고 지하에 숨어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 아이들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바다를 배울 수 있을까? 파도가 치고, 포말이 부서지고, 소리가 요란한 바다를 말이다.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볼 수 있다면 좋을 무수한 가능성의 '바다'를 말이다.

조카는 여전히 바다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데다 아는 단어도 늘었으니 표현이 얼마나 현란할지 웃음이 난다. 촐랑거리며 찰랑찰랑 말하고 있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가족을 데리고 쓰가루로 가는 피란길의 기차에서 드디어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준다. 정작 아이는 '강이네'라며 시큰둥하고 아이 아버지는 '강이라니, 너무하다'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이는 바다를 보았던 것이다!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그건 아이의 권리이니 어쩌겠는가. 내게도 해변의 모래에 앉아 찡그리고 있는 두 살 무렵의 내 사진이 있다. 바다는 우크라이나어 철자로 Mope이고 '모레'라고 발음한다.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모레'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기고자 : 한은형 소설가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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