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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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와 요르겐센

앤 셜 리 2022. 7. 23. 01:21
죽음과 태어남은 하나라네 젊은이.
기쁘고 가슴아픈 하나라네.
돌아오고 떠나는 하나라네.
만나고 헤어지는 하나라네.

오, 인간의 어리석은 근심걱정이여,
그대의 날개를 내리치게 하는
아귀다툼은 얼마나 거짓되던가.

ᆢ아사시에서 만난 요르겐센ᆢ
왜 성 프란체스코를 좋아하시나요?
그는 르네상스 이전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어요
성프렌치스코는 신의 가장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까지도 그는 허리를 굽혀 귀를 기울이고는
그들이 지닌 불멸성을 노래로 들었어요
그는 사랑과 고행의 수련을 통해서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과, 비웃음과, 불위와, 추악함 따위의(날개없는 인간들이 현실이라 일컫는) 현실을 자신의 영혼으로 정복했고, 현실을 진리보다도 더욱 참된 현실적이고 기쁜 꿈으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조용히 사색을 계속하는 어조로 요르겐센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 투쟁에서 나를 구원하겠다는 얘긴가요?
난 당신을 돕지 못해요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길을 찾아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냐구요? 덧없는 것으로부터죠 덧없음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영원한 대상을 찾아야 해요.

그는(요르겐센) 아사시 언저리에 이르자
거대한 바실리카를 가르켰다 바실리카 안에는
프란체스코의 작은 교회당인 포르티운쿨라가 들어 앉았다. 그가 말했다.
저 포르티운쿨라 속에서 몸이 다섯군데 상처를 입은 성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어요. 하지만 나는 창피해져서 화를내며 몸을 일으켜 나와 버렸죠. 와 나는 무릎을 꿇었고,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인가 하고 혼자 생각 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형언하기 어려운 평화로움이 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어요.왜, 어째서 그런 안도감을 느낄까? 나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죠. 그리고 정말로 그것을 그때까지 내가 맛본 어느 행복감다도 벅찬 행복감이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마음속의 무엇인가는 믿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것은 모든 초자연적인 사물을 비웃고, 오직 하나 인간의 지성, 인간 지성이 얘기 하는것만 믿었어요 그것이 내 마음의 문간을 가로 막고
기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죠.
그가 다시 입을 다물자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어떻게 구원이 당신을 찾아왔나요?"
거의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게 소리없이 찾아왔죠. 과일이 무르익어 달콤한 즙을 만들어 내듯 내 마음이 무르익어 달콤해졌어요.
갑자기 나에게는 모든 사물이 간단하고
분명해졌습니다.
고뇌와, 주저와, 싸움이 끝났죠.
나는 프란치스코 발밑에 앉아 천국으로 들어갔어요. 프란치스코, 바로 프란치스코가 나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죠.

내 얘기만 너무 많이 늘어놔서 미안하군요.
요르겐센이 말했다 이건 고백이라고 생각하세요.나는 당신보다 나이도 많기도 하지만, 도움이 될 고백은 그런 형태의 고백뿐이기 때문에
아랫 사람에게 고백 하기를 좋아합니다.
감정을 숨기려고 웃으며 내가 말했다.
"아, 프란체스코가 정말로 천국의 수문장이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는 성자와 죄인들,믿는자와 이단자들, 심지어 백만장자도 들여 보냈겠죠 그래요 가장 흉측한 동물인 쥐와, 지렁이와,하이에나까지도요"
하나님의 가난한 사람(성프란치스코)이소박함과 순수성과 사랑을 지닌 사람이 우리들이 사는 황금 만능주의와 재물의 시대에 , 세상에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나는 프란치스코의 오름길을 따르지 못하는 내 무능력을 이렇게 정당화 했다.)
나는 스스로 위안을 얻으러고 새로운 신의 가련한 인간이 이미 지상에 출현 했씀을 알지 못했으니 그를 둘러싼 문둥ㅇ들은 흑인이었다.

나는 불교의 나태함으로부터 혁명적인 행동으로 끌어내려고 재촉하던 벨를린에서의 결정적이고 과도기적인 시기에 그를 알았더라면나는 나 자신의 비겁함에 더욱 수치를 느꼈으리라 p528
케케묵은 적(신)

돌아오던 길에 나는 길가에 핀 들꽃이눈에 띄자 그것을 꺽으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 꽃은 살었어요
삶의 외경(畏敬)을 마음에 지녀야 합니다.
작은 개미 한마리가 그의 저고리 옷깃을 따라 올라갔다그늣 보기드문 다정함을 보이며 그것을 잡더니 사람들이 밟지 않을만한 길섶 땅바닥에 놓아 주었다. 비록 입조차 열지 않았지만 아사시의 조상들이 쓰던 다정한 인삿말처럼 <개미형제>라는 말이 그의 혀끝에 감돌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길이 비록 내길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신념과 집념을 가지고 그의 오를길을 올라가는 모습에서나는 준엄한 교훈과커 다란 위안을 받았다.그날 이후로 나는 성프란체스코의 생애란 동화가 아님을 확신했고 , 따라서 인간은 아직도기적을 지상에서 행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날 이후로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서, 영원속에서, 신의 품안에서 너무나 밀착 되었으며 깊이 마음이 끌리는 두 인물을 나는 다시는 따로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아사시의 성프란치스코와 알베르트 슈바이처, 그들은 형제처럼 닮았다.
고통을 받는 모든 존재 (행동으로 표현된)에 대한 똑같은 자비와 연민 한사람은 백인나환자를 다른 사람은 아프리카의 흑인 나환자를 둘 다 추악함과 고통의 가장 끔찍한 상징인 문둥이들을 선택했다. 자비와 연민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메타라고 했어야 옳을 노릇이지만 인간의 고통이 이 두 형제의 마음속에 심어 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표현은 오직 그 불교 용어 뿐이다. 자비와 연민에는 고통받는자
그리고 고통을 함께 받는자 이렇게 둘이 존재한다. 그런가한면 메타에는 절대적 동일성이 존재한다.문둥이를 보면 나 자신이 문둥이가 된다. 9세기의 이슬람 신비주의자 사리알 사카디 가 더할 나위없는 정의를 내렸다
완전한 사랑은 서로 (오, 나자신이여!)라고 불러도 되는 두사람 사이에만 존재한다.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란 오직 남들을 구원하는 길 뿐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