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감동이 없다
노란 리본으로 메워져 있던 사람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창들이 이제는 예쁜 꽃이나 맛있는 과자, 잘 나온 셀카 사진으로 대부분 바뀌었다. 이것이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잊은 결과라고는 보지 않는다. 무책임한 선장을 믿고 지시에 차분히 따르다 어이없이 희생당한 착한 학생들과, 책임감과 제자 사랑으로 그들과 운명을 함께한 선생님들, 승객들을 먼저 내보내며 마지막까지 소명을 다했던 승무원들, 나라의 세금을 축낼 수 없다며 가장 싼 수의를 골라 우리를 한 번 더 통곡하게 했던 고(故) 정차웅 학생의 아버님까지 수많은 사연과 한 맺힌 이야기들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다만 너무나 아프기에 애써 잊으려 노력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아픔의 치유를 위해 나는 서울대의 단원고 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에 지원해 단원고 1학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안산까지 왕복 3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인 데다, 고작 두세 살 차이에 몸집까지 작은 나를 학생들이 잘 따라줄지 걱정도 됐었다. 하지만 배우려는 열의와 착한 마음씨를 가진 다섯 명의 제자들은 수업 태도나 과제 수행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부르며 대우해 준다. 바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의로운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 정차웅군처럼 내 제자들도 그 부모님들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학생들이다.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대리 기사 폭행 사건을 접하면서 내 제자들과 그들의 부모님과 다를 바 없었을 세월호 희생 학생들과 그 유가족들이 혹시라도 오해를 받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내 제자들과 있다가 지나던 사람들과 다툼이 생겼다면 분명히 내 제자들은 "어려 보여도 우리 선생님이세요. 불손하게 하지 마세요"라고 내 편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제자들마저 다툼에 휘말리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학생들을 엄하게 제지하고 다툼의 상대방에게 싹싹 빌었을 것이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학생들은 아무 상관없으니 저를 나무라주세요. 제가 선생이니 제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유가족 대표들을 싸움판으로 끌어들인 그 국회의원은 대리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옳은 것이다. "기사님, 아이들을 잃고 가눌 길 없는 슬픔으로 실수하신 분들입니다. 더구나 저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 제가 기사님께 잘못을 했으니 유족들은 용서해주시고 이해해 주세요. 국회의원인 제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그랬더라면 그 대리기사님이 어떻게 얘기했을까? 나는 그분이 당연히 그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아이들의 희생을 누구보다 슬퍼해 분향소를 찾았으며 가난했지만 성금까지 낸 착하디 착한 사람 아닌가.
이렇게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많은데 왜 우리는 평화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엔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감동이다. 위선이 아닌 진정성 가득한 감동은 평화를 향한 지름길임을 우리는 교황 프란치스코에게서 보았다. 하지만 곧 잊어버린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박형서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