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구의 비명 & 혜자의 눈꽃
천승세
1939년 목포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9년 작고.

만해 문학상을 받은 작품 <황구의 비명>
아내의 돈을 떼먹고 달아난 은주를 찾아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받아오라는 아내의
지시를 받는다. 그 돈이 있어야만 나의 가족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
나는 은주가 있는 미군 기지촌인 용주꼴을 찾아 가까스로 수소문해 은주를 만난다. 은주를 만나는 길에서 직접 마주친 삶의 스산한 풍경들, 다른 미군 기지촌이 대부분 그렇듯 매춘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가난한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은주의 삶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갖도록 한다. 은주의 삶도 용주골의 매춘녀의 삶과 다를 바 없기에 그렇다. 그리하여 나는 은주에게 아내의 돈을 돌려받기보다 은주가 이 매춘녀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고향에 돌아갈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은주가 있어야 할 곳. 은주가 건강하게 일해야 할 곳.
은주와 같은 민중이 삶의 가치를 보장받아야 할 곳은 돈의 노예가 된 채
몸을 혹사시키는 곳이 아닌, 가난하고 선량한 민중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주는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타락한 근대로부터 상처받은, 은주와 같은, 은주와 같은 민중을 온전히 치유해 줄 수 있는 풍요와 평화의 대지다.
"은주! 황구는 황구끼리 ᆢᆢ황구는 황구끼리 말이야"
"가겠어요 당장이라도 떠나겠어요."
은주의 젖은 등으로부터 보리멸 익은듯한 비린 체취가 풍겨왔다.
보리밭 냄새.
"봐요 ᆢᆢ그것 봐요ᆢᆢ향수(미군들 체취)가 빗물에 씻겨 버리고 나니깐 고향 냄새가 나잖아. 보리밭 냄새가 말이야 ᆢᆢ"
'민중=황구' 란 민중들은 서로 고통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연대다.
나보다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민중들과 다 함께 살아야 한다.
천승세작가의 삶의 윤리 감각을 알게 된
작품!.
<혜자의 눈꽃>
혜자의 엄마는 폐병 말기에다 정신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혜자의 엄마는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혜자, 혜자 할머니와 함께 단출한 삶을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하늘을 메우고 있다.
어지러운 눈발 속에서 여인의 글썽한 눈이 보였다. 여인의 해 등거리는 웃음을 봄 삼아 폈을, 어쩌면 그보다 먼저 힘겨운 목숨의 곁가지 위에 안쓰럽게 펴났을, 그 노란색 꽃술의 눈꽃들은 이제 더는 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눈물처럼 아리고 매운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혜자 할머니는 무슨 뜻으로 여인의 발걸음 뒤에다 꽃잎을 새겨주면서까지 여인의 힘겨운 나들이를 용서했는지 모른다.
혜자의 눈꽃은 정신줄 놓은 엄마를 따라다니며 엄마가 뚫어놓은 노란색 오줌구멍에다 앙증맞도록 작고 귀여운 고무신 자국을 내는 거였다.
우리 엄마는요, 쪼금만 걸어도요 힘이 없어서 오줌을 막 싼대요.ᆢ그래서 할머니가요 날 보고요. 엄마가 아저씨 집에 갈 때는 꼭 따라다니면서요, 엄마가 오줌 누고 나면 표안나게요. 눈꽃을 만들랬어요.
첫 번째 고무신 자국에서부터 차례로 결이 영근 꽃잎을 새겨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자의 추한 흔적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