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날엔 니체

"우울한 날엔 니체" 이 시대 우울한 사람들에게 묘법이 있는 걸까? 책 제목만 보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어휘가 낯설고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마음 내키는 소제목부터 보다가
힘들면 닫아두고 궁금하면 다시 펴고
음절 하나하나를 새기며 읽었다.
니체의 대표적 "신은 죽었다” 는 말은 단순히 무신론을 말한 게 아니라, 과학의 발달로 점점 신이 설자리가 없어진다고 한다... 이 후,
기존 가치와 도덕이 붕괴된 시대를 인식하고,
공허 속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19세기 니체가 강조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초인" 은 얼마전에 읽고 블로그에 올려놓은 20세기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일치했다.
작가 카잔차스키가 쓴 전기(傳記) 세상을 자유롭게 살다 간 영혼. 카잔차스키도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러워했던 인간!
대한민국 지성인 101인이 추천한 책, 그리스인 조르바.
우울한 날엔 니체,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2, 피안의 영원성을 위해 차 안의 삶을
고통으로 살지 말아라.
(피안(彼岸) : 이상 세계, 초월적 세계를 의미함.
차 안(此岸) : , 현세,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
3, 삶을 어린아이처럼 놀이처럼 살아라.
4, 예술적 삶을 살아라.
5, 고통을 감수하라.
(고통을 ‘성숙의 계기’로 삼아라.)
6, 영원회기, 단조로운 삶의 영원한 반복이 주는 고통을 알아라.
7,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지상의 신으로 살아라.
8,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라
오늘을 즐겨라.
9, 필연에 순응하고 그 필연을 자유의지의 행위로 바꿔라.
그것이 비참 하지만 다른 길이 없다.
10, 태어났으면 징징대지 말아라.
11, 사람들이 천당 같은 우상에 매 달리는 건 허무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다.

구원은 지상에서..
누구도 모르는 것.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과 공생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살다 심판은 나중에 맡기자.
이상한 논리의 사이비집단에게 사기당하지 말자.
철학과 실용의 균형
지루한 설명 구성 중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추렸다.
우리는 인간의 심오한 욕구인 영원성에 대한 욕구를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를 안다. 먼저 니체는 영원한 삶을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을 심화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대한 대속으로 본다. 기독교인이 사후에 최고의 삶을 희망하는 것은 삶에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고통에 초대되어 마침내 영원성을 향한 보장을 얻는다. 차 안의 모든 쾌락은 피안의 모든 쾌락과 입각한 가설적인 것이다. 기독교의 영원성은 덧없음과 생성에 대한 축하가 아니라 삶이 가진 허약하고 일시적인 양상에 대한 대가다.
삶에 영원의 이미지를 새겨라.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은 실제 세계와 현재의 우리 삶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세계는 일시적인 겉모습에 불과하고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자 삶은 시험이상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기껏해야 예비학교가 되고 최악의 경우는 형벌이 된다. 피안의 영원성 앞에서 차 안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삶의 무게 중심을 삶이 아니라 피안, 즉 무에 둠으로서 우리는 삶에서 무게 중심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위대한 거짓은 일체의 이성, 본능의 본성 일체 ㅡ삶에 도움이 되고 미래를 보증하고 그 후로는 계속적으로 의혹을 조장하는 본능에서 유익한 모든 것 ㅡ을 파괴한다.
영원히 산다는 관념이 없다면 도처에는 무만 존재한다. 인간이 더 이상 내세를 믿지 않으면 허무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이 내세를 믿는 바로 그때 현재의 삶은 그 무게와 신랄함, 중요성을 상실했다.
영원한 삶은 현세의 삶을 필요한 만큼 강렬하게 살지 않는 구실이 된다.
우리는 피안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뒤집어서 지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과 우리가 수행 중인 행동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나는 삶만을 사랑한다'
우리는 현재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보석 세공인처럼 우리 존재를 다듬고 수천 번 재가공하고 완벽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더 강렬하게 도취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즉 예술가처럼 삶을 살아야 한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기는 새로운 창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단조로운 삶의 영원한 반복이 주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삶을 새롭게 사는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풍요로운 삶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관념이 뿌리내리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게 다양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수차례 쓰레기통에 던져질 법한 연극을 다르게 창작하는 셈이 된다.

몸의 지혜
진리보다 더 높은 가치는 인간의 활동이 존재하고 창조하고 상상하고 고안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인간의 능력이다.
매 순간 신체는 극도로 복잡하게 작동한다. 소화, 보기, 듣기, 모든 신진대사의 조절과 같이 의식이 결코 수행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의식보다 더 영리하고 무한할 정도로 더 섬세하고 예민하며 지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운명, 숙명, 지배적인 열정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지만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제약을 느끼게 된다.
삶을 어린이 놀이처럼 생각하라. 아름다움과 예술이 우리를 추한 진리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과 동일하게 바로 삶을 놀이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비극적인 삶의 양상을 결될 수 있다.
프리드 히 니체 1844~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