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존경하는 분들

고희동 미술관

앤 셜 리 2024. 6. 7. 14:00

2024.6.2일 일요일 맑음

남천나무 꽃

자유는 고독을 동반한다 했던가
혼자라도 어디든 떠나고 싶은 날.
중앙썬데이 문화면에
종로구 고희동가옥에서 그림 전시회가 오늘까지.
검색해 보니 종로 3가 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리라네
물한병과 선크라스 핸드폰등 챙겨 전철역으로..


전에도 와봤지만 종로3가역, 2번 출구에는 엘리베이터가 안 보인다. 계단을 숨차게 올라와야 했다. 올라와 주변을 보니 덕성여대도 보이고 거리엔 외국인이 태반이다.
날아갈 듯 진열한 한복대여점도,
멀리 기왓장 얹은 담장도 보인다.


'빨래터'라는 마을 버스정류장, 코앞에 고택을 두고도 두리번두리번
누구에게 물어보고야 알았다.
시야가 이렇게 좁아서야 알려준 분께 부끄러웠다. 고운 자갈이 깔린 고택 마당에 들어서니
고희동 화가님의 흉상이...
두 손 모아 인사를 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고희동미술관,1918년 일본 유학후 돌아와 직접 설계하고 지은 곳으로 41년 거주했다.
안마당

돌아서니 단정한 ㅁ자형의 고택, 참혹한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6.25도 겪어냈을 백 년 가옥. 양옆에는 은행나무와 목련이 보초처럼 서있다.
사람은 떠난 지 오래 건 만 몽당 잘린 은행나무는 옆구리에서 새파란 생명이 움트고 목련과 함께  옛집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
시류에 빠른 역관 가문의 아들
10대 초반에 프랑스어 조기교육을 받고 프랑스 화가 레미옹을 통역하다 서양화의 매력에 빠져 일본으로 유학 6년 동안 서양화를 배우고 1915년 돌아왔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대부분 그림을 모르고 더구나 서양화는 더 알 까닭이 없었겠지. 되다란 유채물감을 보면 닭 똥이라는 등, 냄새가 고약하다는 등,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그림에 대한 몰이해로 생활이 안되니 화가는 1920년 이후엔 동양화를 그렸다. 그래도 허망한 유학은 아닌 것이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 별도로 서화협회를 조직해 매년 전시회를 운영했다.

그 시대 화가의 배경과 삶을 영상으로 해설. 의자에 앉아 시청했다.


1957년 저작권법이 공포된 훨씬 이전 1933년에 '화가의 저작권'을 주장한 것도 고희동 화가였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사연도 있었지만 근대 화가들은 그를 통해 화단을 형성했고 이 땅에 서양화의 기초가 되었다고 신문에 쓰여 있었다.

이 가옥은 세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아들의 사업실패로 제기동으로 이사) 2002년 헐릴 뻔했지만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이 나서 등록 문화재가 됐다.
순환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찍은 동네 분위기

최초의 서양화가였지만 서양화로 대성하지 못했다.남아 있는 고희동의 서양화는 이 세점뿐이다.정자관을 쓴 졸업작품은 도쿄예술대학교 소장. 외 두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휘문고를 졸업한 화가의 제자로는 1세대 서양화가 도상봉ㆍ이마동ㆍ오지호ㆍ구본웅, 시인 이상, 간송 전형필도 있었다.
반가운 이름도 보인다
안채 1.2.3 전시실에 화가의 다양한 작품을 보며 당대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공간에
내가 서 있구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그림에 대해서 모른다.
그림 한 장에 열사람이면 열 가지로 감상하겠지만 나는 그저 가슴이 찡하게 아파오면 그 그림이 나에겐 명작(名作)이다.
백 년 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신문을 보고 현장 답사를 하고 선지식인의 삶을 공부한 하루!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가옥을 보존해 준 시민단체와 종로구 지역주민들께 감사드리며...

[일러스트 김민호]

말년엔 민주당소속 참의원을 끝으로 1886~1965년 10월 영면. 7일 동안 예총장으로..

지하철 종로3가역 2번출구 나오면 마을버스01번 로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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