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책.

속삭임 (오탁번시인)

앤 셜 리 2024. 7. 15. 09:10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지금 우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 있는 것 같다
왜냐면 엊그제 하늘나라로 가시는
이어령 교수님을 배웅하셨던 오탁번 시인의 유고시집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새 뭔 일이 있었기에..

(1943-2023, 80세) 일주기에 맞춰 발간한 오탁번 시인의 유고시집


시집의 제일 첫머리엔 시 "옛말"이,
마지막엔 시 "속삭임 9"가 놓여있다.
옛말은 선생의 태어난 집과 유년시절 가족에 대한 추억을 담은 시다.
속삭임9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쓴 아홉편의 시다

고인의 유작 시

--옛말--
잠결에도 꿈결에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내 옛말의 들머리는
백운면 평동리 바깥 평장골 169번지
호적등본만 한 우리 집이다
남아있는 사진 하나 없지만
그냥 잿빛으로 눈앞에 떠 오르는
내가 태어난 우리 집이다
1951년 정월 상주로 피난 갔다가
봄이 되어 돌아오니
흔적 없이 사라진 우리 집!
전쟁이 치열할 때
군용 비행장을 건설할 셈으로
동네를 다 불 살라버렸는데
원주 근방까지 쳐들어왔던
적군이 후퇴하자
군인들이 다 팽개 치고 북진했다
빨갛게 불타 죽은
향나무 한그루가
잿더미가 된 우리 집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봄 내내 움막에서 살았다
참꽃이 불알산을 물들이고
초저녁부터 부엉이가 울었다
가을이 되도록
나물죽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품앗이로 외양간만 한 새집을 지었다
맑은 샘물이 솟는 앞산아래
바깥평장골 우리 동네는
어깨 겯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도 눈감으면
쇠버짐 부스스한 내 짱구도
침 발라가며 쓴 몽당연필도
도렷하게 잘 보인다
어머니의 밭은기침에도
문풍지가 울고
한밤중 요강에다 오줌 누면
달걀빛 처마에 깃든
참새가 잠을 깬다
해와 달은 쉼 없이 뜨고 졌다
속삭임 14페이지

고향 제천 원서동 문학관에서..문학강의


-- 일없다 --

애련리 한치마을
큰 느티나무 앞 폐교에는
바람이 불고 낙엽이 날리고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뿐이었다
오석烏石에 새긴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가
번개 치듯 내 눈에 들어왔다
교실 세 칸에 작은 사택
다 주저앉은 숙직실과
좁은 운동장이
옛동무처럼 낯익었다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을 살려
'원서헌'遠西軒이라 이름 짓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을 잔다
먼 서녘, 원서는
종말이 아니라
새날의 시초라고
굳이 믿으면서
스무 해 되도록
이러구러 살고 있다
서울 친구들은
낙향해서 괜히 고생하는 내가
좀 그래 보이겠지만
수도가 터지고
난방이 잘 안 돼도 일없다
두더지가 잔디밭을 들쑤셔도
사람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와도 다 일없다




2023년 2월 14일 별세.
유족에 의하면 선생은 병이 온몸으로 퍼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지한 2월 초부터 이 시집을 엮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의 배치와 각각의 장에 붙은 제목, 그리고 '속삭임'이란 시집 제목 모두 시인이 직접 쓴 것이다라고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문학적 삶을 스스로 완벽히 정리해 놓고 분신 같던 이 책을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남겨주고 떠나셨다고 고형진 문학평론가 말씀이다.


속삭임 1~9 장은 암을 선고 받고 마지막 순간이 임박해왔음을 알고 자신에게 독자에게 생을 마감하는 심정을 드러낸 시이다.


이성복시인은 스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스승이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오탁번시인이 참 스승이 아닐까 "속삭임" 시집을 읽고 든 생각이다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모리 교수가 그랬고 몽테뉴도 그랬다. 최근 이어령교수와 절망 속에서도
유모어를 잃지 않은 오탁번 시인님도 여기에 올리고 싶다. 속삭임 1에서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갈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 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라는 대목이 나온다. 가늠 할길 없는 정신의 높이에 한없이 숙연해졌던 순간
누구나 가야 될 이길.

2022년 1월 5일. 백아 이어령, 종자기 오탁번, 두분 하늘에 별이 되셨습니다. 만나서 얼싸안고 반가워 하셨겠네요.


생사를 초월한 스승이 우리 곁에 있다면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두렵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유고시집에 기록된 시인의 마지막 작품 창작  날짜는 2023년 2월 4일로 세상을 떠나기 10일 전이다.

고뇌로 엮어졌을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생의 끝, 롤 모델로 멘토로 조만간 교보에 가서 '비백'과 함께 다시 뵐 것이다. 고맙습니다.

하늘에서도 문학 세상에 빛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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