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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17세 때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 들어… 웅변이기보다 기도였다

앤 셜 리 2019. 2. 27. 13:06

강원도 양구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양구인문학박물관에서 인문학 강좌의 강사들을 추천하다가, 내 고향 친구이자 철학자 안병욱(1920~2013) 선생과 인연이 깊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한 시간을 넣기로 했다. 내가 강의하기보다는 도산기념사업회 김재실 이사장이 적임자일 것 같아 수고해 주기를 요청했다. 다 합치면 16강좌 중 하나가 된다.

안병욱 선생은 한때 흥사단 이사장직을 맡았을 정도로 도산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나에게 행운을 빼앗겼다는 아쉬움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자기는 꿈에 한번 도산 선생을 뵌 일은 있으나, 나는 직접 뵈었을 뿐만 아니라 두 차례나 도산의 마지막 강연과 설교를 듣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열일곱 살 때 일이다. 도산이 병 치료를 받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선생이 평양 서남쪽에 있는 대보산 산장에 머물고 있을 때 20리쯤 떨어져 있는 우리 고향 송산리를 방문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덴마크의 농민 학교를 모방해 설립한 학교가 있었고 주변 마을에서 신도 200여 명이 오는 교회도 있었다. 그해 초가을이었다. 도산이 찾아와 내 삼촌 집에 머물면서 토요일 오후는 마을 유지들에게 강연했고 이튿날에는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신사 참배 문제로 1년간 평양 숭실학교를 쉬면서 고향에서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행사가 도산의 마지막 강연과 설교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선생은 얼마 후에 다시 수감되었고 이듬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 일생에 가장 서글픈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도산의 강연을 들었기에 82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내용과 인상을 잊지 못한다. 안병욱 교수가 나를 부러워할 만도 하다.

도산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 사랑과 인재 교육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잊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랑을 애국정신으로 보답하자는 간곡한 호소였다. 도산은 웅변가였다고 하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더 컸다. 웅변이기보다는 기도하는 열정이었다.

설교를 끝내고 마을을 떠나다가 자그마한 기와집 뒤 길가에서였다. 저만큼 살려고 하면 몇 평쯤 농사를 지어야 하며 소와 돼지도 기르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도산의 그 표정에서 나는 우리 민족 모두가 저 가정만큼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드리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다. 얼마 전에 나는 사흘 동안 충남의 아산, 예산, 부여 지방을 다녀 본 일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 도산공원에 들렀다. 도산 동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선생님 마음 편히 쉬십시오. 지금은 독립했고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세월이 지나면 국민 대부분이 선생님이나 저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