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3일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자카르타의 호텔을 떠나 귀로(歸路)에 오른 것은 오전 5시 45분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서 인도네시아 방문을 마친 후였다. 동행취재 중이던 기자들도 영문을 모른 채 졸린 눈을 비비면서 그의 전용기에 올라타야 했다. 게이츠의 전용기는 두 차례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워싱턴 DC를 향해 19시간 비행했다. 그동안 그가 귀국을 서두르는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도 오바마에게 대면(對面)보고를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나 보다고 추측했다.
그의 전용기가 메릴랜드주의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하기 직전에야 의문이 풀렸다.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취재진에게 연설문이 한 장 배포됐다. 그가 2시간 뒤 스탠리 매크리스털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의 전역식(轉役式)에서 낭독할 연설 원고였다. 그 순간,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많은 오해가 풀렸지만, 당시만 해도 매크리스털은 백악관으로부터 '역적(逆賊)' 취급을 받고 있었다. 격주간 잡지 '롤링 스톤'이 그가 오바마의 군(軍) 통수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보도하면서 큰 파문이 인 직후였다. 매크리스털은 백악관으로 소환당한 후 34년간 입어 온 군복을 벗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츠는 바쁜 해외출장을 핑계로 그의 전역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게이츠의 생각은 달랐다. 말실수와 과장 보도가 겹쳐서 안타깝게 물러나는 매크리스털을 위로해서 군의 사기를 세워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백악관의 눈치를 보지 않은 채 독자적인 결정을 내렸다. 만 하루 가까이 비행해서 전역식에 참석한 그가 연설대에 섰다. "오늘 모인 사람 중에서 누구도 매크리스털 전 사령관만큼 뛰어나고 중요한 인물은 없다. 그는 미국이 배출한 군인 중에서 가장 특출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승리보다 조기철군에 더 관심이 많은 오바마에게 분명한 소신을 밝힌 것도 게이츠였다. 2009년 12월 오바마가 미 육사 연설에서 "18개월 뒤부터 미군의 철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큰 논란이 일었다. 아프간 전황(戰?v)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철수 계획을 밝혀 미군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자 게이츠가 나서서 오바마가 제시한 것은 아프간에서의 철수가 아니라 '권한 이양(transition)'의 시작이라고 '정정'했다. 이라크에서 했던 것처럼 점진적으로 아프간 보안군에게 권한을 넘길 것이라고 대통령의 발언을 수정했다.
게이츠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었지만, 국가를 먼저 생각했기에 오해를 피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게이츠가 오바마로부터 진심 어린 훈장을 받고, 국민의 박수갈채 속에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당당함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퇴임 후 자신이 속했던 조직으로부터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반항하듯 대통령에게 사표를 던진 한국의 검찰총장과는 차원이 다른 사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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