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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력과 한자 교육

앤 셜 리 2013. 6. 28. 11:23

 

어느 중학교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요즘 학생들 중엔 안중근 의사(義士)를 의사(醫師) 선생님으로 아는 애들도 있다." 설마 그럴까 했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 한 방송사 리포터가 지나가는 학생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학생이 되물었다. "야스쿠니 신사? 신사숙녀 할 때 신사 아니에요?" 일본 전범(戰犯)들 위패를 모아놓은 신사(神社)를 신사(紳士)로 알고 있었다.

▶지난해 고교생 퀴즈 프로그램인 KBS '골든벨'에서 "이비인후과는 어디가 아픈 사람들이 갈까요?"라는 문제가 나왔다. 모두 쉰 문제 중에서 열 번째쯤에 나온 것이었으니까 프로그램 제작진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 셈이다. 그런데 틀린 학생이 무더기로 나와 탈락했다. 이(耳)가 귀, 비(鼻)가 코, 인후(咽喉)가 목구멍을 뜻한다는 것만 알면 쉽게 맞힐 문제였다.

▶하긴 요즘 아이들만 흉볼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가분수·대분수, 중학 들어가 교집합·인수분해 같은 수학 용어를 이름에 담긴 뜻도 모른 채 배웠다. 한자로 假分數·帶分數·交集合·因數分解라고 쓴다는 건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처음 배울 때 선생님이 왜 이런 이름인지 한자 뜻풀이를 해 가며 설명해줬더라면 수학에서 그렇게 헤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과학 시간에 파충류·양서류·갑각류나 화성암·변성암·퇴적암의 뜻과 생김새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 이름들에 쓰인 한자를 알았다면 훨씬 쉽게 깨칠 수 있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말 어휘 가운데 70%가 한자어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교과서에서는 한자로 된 단어·용어가 90%나 된다. 한자어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간편한 우리말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어문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한자를 모르는 어린 세대가 한글로만 쓰인 한자 단어투성이 교과서를 배우기란 암호 해독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공부에 재미를 못 붙일 뿐 아니라 아예 이해를 못 하는 일이 벌어진다. 국어 과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올가을 학기부터 초·중학교에서 교과서 어휘를 중심으로 한자 교육을 하기로 했다. 우선 희망하는 학생을 모아 방과 후 국어·수학·과학·사회 교과서 속 한자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어휘력 없이 공부하는 것은 벽돌 없이 집을 짓거나 총알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다. 한자 교육이 학교 정규 과목이 돼야겠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첫걸음을 떼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