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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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템포를 늦추세요, 옛것의 가치가 보입니다

앤 셜 리 2014. 10. 31. 11:34

"한국 전통의 아름다운 문화 경관들이 빠르게 사라지네요. 더 늦기 전에 그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붙잡아두고 싶어요."

브루노 바베이(73·Bruno Barbey) 매그넘(Magnum Photos) 전(前) 회장이 한국에 왔다. 한국의 '공동체'와 '음식'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다. 매그넘은 정회원 자격 취득이 매우 어려운, 권위 있는 프리랜서 보도사진작가 단체다. 1947년 카파·브레송·시무어·로저 등이 창립했다. 현재 정회원·준회원·후보회원을 합쳐 70명 정도다. 한국인 정회원은 없고, 아시아로 따져도 5명뿐이다. 바베이는 모로코계 프랑스 사진작가로 68혁명, 베트남전 반전 시위, 중국 문화대혁명 등 현대사의 주요 현장을 누볐다.

"한국은 2007년 첫 방문 이후 네 번째입니다. 사실은 진작부터 와 보고 싶었어요. 동료들이 한국전쟁이나 탈북자를 주제로 찍은 사진들을 보며 늘 관심이 컸거든요. 하지만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 이·팔 분쟁, 아프리카 내전 등을 주제로 장기간 촬영을 하다 보니 늦어졌네요." 그는 이번에 한국을 대상으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담을 겁니다. 특히 사라져 가는 전통과 아름다운 문화유산을요."

그는 최근 마장동 축산물시장, 강경 젓갈시장, 순창 고추장 체험관, 증도 태평염전 등을 다녀왔다. "지난번 방한 때는 공업단지·조선소·원자력발전소 같은 발전을 상징하는 현장들을 찍었습니다. 이번에는 주로 마을과 장터입니다. 한국의 공동체와 음식 문화지요." 그는 요즘도 성황제(城隍祭)를 하는 강원 원주 성남마을에서 주민과 치악산 산신께 제사를 올렸다. 경북 영주 무섬마을에서는 씨족마을(집성촌)을 앵글에 담았다. "성남마을에서 성황제 때 본 한국 샤먼(무당)이 아주 흥미로웠어요.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의 무녀(巫女)를 보는 듯했거든요.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서 종교적 엑스터시가 삶에 어우러져 있다니…."

그는 전통과 현대 문명이 공존하는 한국이 신기하다고 했다. "한국인은 고속 성장 속에서도 전통을 쉽게 포기하진 않더군요.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전통문화가 점차 사라져가 안타까워요. 산신령이 과학에 밀려 자리를 잃고, 패스트푸드가 슬로푸드(한식)를 대체하고 있어요. 지금 본 풍경들도 몇 년 뒤면 사진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어요. 한국인들이 자신만의 독특하고 멋진 모습을 지켜가면 좋을 텐데요."

그는 한국인들에게 삶의 템포를 늦추길 권했다. "지난번 방한 때 불과 하루 이틀에 숙소 앞 비포장길에 아스팔트가 덮이고 차선까지 그어지는 걸 봤어요. 프랑스에선 상상도 못할 속도죠. 이런 신속함 덕에 빨리 발전했지만, 그만큼 옛것을 차분히 돌볼 여유는 부족했던 듯해요. 바삐 달리다 보면 몸을 가볍게 하려고 많은 것을 버리게 되죠.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그간 소홀했던 문화유산을 챙기는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요."

바베이는 내년에 55년 사진작가 인생을 정리하는 사진집을 낼 계획이다. 한국서 찍은 사진들도 다수 수록된다. "제가 거쳐온 세계의 격동적 현장들만큼이나 한국은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의 이번 방한 취재기는 다음 달 10일과 17일 방영되는 아리랑TV 특별 기획 다큐 'In Frame Season 2'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