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째 외손자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엄마와 승강이를 벌이는 경우를 가끔 본다. 엄마는 다른 집 아이보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데 아이는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외손자뿐 아니라 요즘 아이들 전체가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참 많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을거리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놀 수 있는 시간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요즘은 끼니 걱정은 줄었다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는 '놀 권리'를 잃어버린 셈이다. 영양이나 교육에 대한 권리엔 익숙하지만, 아직 뛰어놀 수 있는 권리에는 생소하다는 분들이 적지 않다. '놀 권리'는 아동권리협약 31조에 엄연히 명시된 어린이 권리 중 하나다. 어린이는 안전한 환경에서 유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놀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유엔(UN)은 1989년 '어린이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인간'이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아동권리협약을 선포했다. 2000년에는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15년을 목표로 빈곤·영양·교육·보호 관련 새천년개발 목표 8개항을 세웠다. 아동권리협약이 선포된 지 25년을 맞는 오늘, 2015년까지는 단 40일을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아직도 어린이는 권리를 지닌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연약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최근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어린이들이 휴대전화, 컴퓨터, TV 시청 등에 보내는 여가는 주중 40%, 주말 60%에 달한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바깥 놀이 시간은 별로 없는 셈이다. 유니세프는 단순히 노는 권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려 땀 흘리며 놀 때 건강하게 자란다고 생각한다. 남과 어울리며 유년을 제대로 누려야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고, 그런 어른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새천년개발 목표의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지속 가능함'이다. 어떤 거창한 목표도 도중에 중단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어린이가 지속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간을 충분히, 천천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행복한 삶을 지속 가능케 하기 위해서 어린이들은 더 놀고, 더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며 자라야 한다. 아이들이 너무 숨 가쁘지 않게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지켜줄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오종남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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