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인 2000년, 미국은 세계경제의 절대권력자였다. 빚을 내 주식 투자에 나선 미국인들은 IT(정보기술) 주가가 폭등하자 부자가 됐다고 착각, 신용카드를 팍팍 긁었다. IT버블(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유명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미국이 너무 커서 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수퍼파워 미국이 망할 가능성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8년 뒤 새뮤얼슨의 불길한 예언은 현실로 나타났다. 다만 원인이 주가 하락이 아니라 주택 가격의 폭락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묻지 마 부동산 투자' 광풍(狂風)이 2000년대 중반에 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던 주택 가격이 하강하기 시작하자 빚을 내 집을 산 개인들과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연쇄 부도가 났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미국도 자본주의의 철칙인 '빚의 보복'을 피하지 못하고 파산한 것이다.
요즘 세계경제의 뇌관이 된 그리스 사태도 미국처럼 '빚의 보복'이다. 다만 미국은 부동산 광풍으로 민간 부채가 급증한 것이 원인이었고 그리스는 연금 개혁, 특히 공무원연금 및 급여 개혁의 실패로 정부 부채가 방아쇠가 된 점이 다르다. 게다가 좌파 지도자가 개혁을 외면하고 포퓰리즘 정치를 선택하는 바람에 서양 민주주의 발원지의 운명은 작두 날 위에 올려져 있다.
미국과 그리스의 파산 원인은 한국 경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택담보대출이 대부분인 가계 부채는 1100조원을 넘어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정부는 이자만 갚는 대출을 원리금을 함께 갚는 미국식 모기지론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진 사람들이 돈이 급해 마이너스 대출을 더 받는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공무원연금 개혁 방안은 국민의 세금 부담을 별로 줄여주지 못했다. 그러니 공무원들의 편안한 노후 생활을 위해 국민의 허리가 휘고 정부의 재정 적자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빚이 많다고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빚을 내도 이자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면 감당할 만하다. 다행히 한국은 서해 건너에 넓고 넓은 중국 시장이 있다. 불행한 점은 최근 중국 상황도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주가가 폭락하고 성장률도 하락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를 만들어 중앙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려는 것도 중국 내부의 과잉 시설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복안이다. 그러니 가만 앉아서 중국발(發) 훈풍만 기다릴 상황도 아니다.
나라가 빚에 쫓겨 파산 지경이 되면 영토 매각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 사태 초기에 유럽에서는 "아름다운 에게해의 섬들을 팔아 빚을 갚아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도 이런 경험이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달러가 없어 원유도 수입하지 못할 판이 됐다. 전기 부족으로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면 등굣길 초등학생이 꼼짝없이 갇혀야 했다. IMF(국제통화기금)의 긴축 처방은 그리스보다 훨씬 가혹했다. 미국처럼 달러를 찍어낼 수도 없었다. 악몽에 시달리던 한 공무원의 머릿속에 "독도를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떠올랐다고 한다. 강도 높은 부채 구조조정이 없다면 우리가 그리스처럼 섬을 팔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신문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작품 그 도시] '김영갑의 사진' ― 제주 두모악 (0) | 2015.07.04 |
---|---|
한국인 '죽음의 質' 끌어올릴 웰다잉 법안들 (0) | 2015.07.04 |
일등병 (0) | 2015.06.26 |
용서의 힘 (0) | 2015.06.26 |
[인문의 향연] '미움 받을 용기'가 正常일까 (0) | 2015.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