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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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 그 도시] '김영갑의 사진' ― 제주 두모악

앤 셜 리 2015. 7. 4. 09:12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선생님이 먼 곳에 와 있다며 사진 몇 장을 주셨다. 사진 속 그녀는 밀짚모자를 쓰고, 건강하게 탄 팔과 목덜미를 보이며 이스탄불의 잘 익은 햇빛 아래에 앉아 있었다.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에 서 있을 때 가장 온전해진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이고 보다가, 제주도에 가고 싶어졌다.

내게 제주에 가고 싶다는 말은 '혼자 걷고 싶다'란 말과 같다. 위를 올려다보면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있고, 옆을 바라보면 낭창한 푸른 바다가 있어, 눈이 고단하지 않은 길을 걷고 싶다는 말과 같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생각할 것이 많아 마음이 무겁다는 뜻이다. 정신적 고통에는 해독제가 오직 하나만 있는데, 그건 바로 육체적 고통이라고 말한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 말을 모르던 시절에도, 나는 머리가 복잡하면 무작정 걸었다.

제주에 갈 수 없을 때, 내가 하는 일이 있다.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대신, 인터넷 창을 열어 두모악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다. 손으로 쓰다듬듯,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의 환상곡' 또는 '지평선 너머의 꿈' '숲 속의 사랑'을 마우스로 클릭하고 몇 시간이고 김영갑의 사진을 봤다. 사진 속에는 나무가 웃고, 구름이 울고, 바람이 한 계절을 가득 담아 갈대를 옆으로 누이며 불고 있다. 사진가는 제주의 풍경을 그렇게 수십 년간 오롯이 담아냈다.

하늘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우리는 하늘이 높은 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 새가 없었다면 말이다. 만약 나무가 없다면, 꽃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주 방향을 틀어 너울대는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을까. 만약 쏟아지는 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한낮에 달궈진 흙과 아스팔트 냄새를, 씻겨 내려가는 먼지 냄새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이 외면이든 내면이든 결국 '풍경'을 담아내는 일이라면, 사진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착역에는 결국 '바람, 비, 나무, 하늘, 꽃' 같은 것이 서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연일 우울한 소식이 들리던 그날, 내 눈에 처음으로 다른 것이 보였다.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 김영갑이 쓴 글이었다.

"하늘을 본다. 습관적으로 무의식 중에도 하늘을 본다. 별이나 달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름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기 위해 하늘을 본다. 구름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도 달라진다.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면 내 마음도 수굿해지고, 구름이 조급해지면 덩달아 마음도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구름의 변화를 좇아 동분서주하며 섬에서 20년 세월을 보냈다."

'생의 봄날을 향한 고행'이란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발견하고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 날 나에게 광풍과도 같은 루게릭이 엄습해 왔다…. 불치병이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 용감한 투사였다. 훈장은 받지 못했어도, 내가 하고 싶은 작업에 최선을 다해 부끄럼 없이 싸웠다. 사람들의 주목은 받지 못했어도, 스스로에게 용감했었노라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두려움에 눌려 단단함은 안개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동안 나는 자신이 용감한 투사인 줄 알아왔지만, 착각이었다…. 내 몸의 근육은 이 순간에도 촛농처럼 녹아 없어져 거동이 힘들다."

글 위에는 김영갑이 찍은 구름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그 사진에는 수종을 알 수 없는 나무 세 그루가 외롭게 서 있었다. 같은 곳이지만 다른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한 건 오직 시간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온전한 빛을 찾아 기다리는 일이기도 한데, 자신이 느낀 풍경과 내면의 풍경을 일치시키기 위해, 그들은 빛을 포착할 타이밍을 기다린다.

김영갑의 사진 속 빛은 구름 위에 떠 있었다. 어떤 것은 구름을 뚫고 나가 있었고, 어떤 것은 구름 속에 스며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보느라 한동안 '구름'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진 속에 있는 구름을 보았다. 어쩌면 '보았다'를 '읽었다'고 고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루게릭을 몰고 온 구름 역시도 한순간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오늘 견뎌내야 하는 육체적 통증으로 내일이면 또 다른 통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제 견뎌낸 통증은 오늘과는 또 사뭇 달랐다. 그동안 내가 보았던 구름들, 내 안에 흐르고 있는 구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고 있다. 내 안에 흐르는 구름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를 지켜보며, 그동안 내가 보았던 구름들을 떠올리며, 나의 내일을 가늠해보곤 한다…. 오늘도 흔들린다. 구름이 흐르는 대로 흔들린다. 맑은 날은 빠르게, 흐린 날은 더디게, 구름 따라 흔들린다. 어떤 구름이 몰려오느냐에 따라 기박할 수도 있고, 느긋할 수도 있기에 사람들은 구름에 따라 울고, 웃는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이 담아낼 수 있는 건 오늘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은 오늘만 산다. 그렇게 살아내는 오늘은 얼마나 진하고 깊고 절망적이며 희망적일까. 죽음 앞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배낭에 낡은 운동화를 넣어 가지고 다니며, 30분이면 갈 거리를 3시간씩 걸어 퇴근하던 어떤 시절에 나는 많이 불행해서, 불행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걸은 덕분에 걷는 일에 자신이 붙었고, 움직이며 생각하는 마음의 근력을 얻었다.

메르스 확진 환자가 가장 많았던 병원에서 일한 탓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곤욕을 치렀던 K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세상에 온전히 나쁜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그제야 '진짜'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이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며 누가 내 사람인지, 내 사람인 척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배척'이 아니라 내려놓고, 놓아두고, 흐르는 것은 막지 않겠단 뜻이다.

김영갑의 말이 맞다. 그가 찍은 수많은 구름은 변화무쌍한 삶처럼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그런 지점일지 모른다. 변하고, 흐르고, 멈추지 않는 것들 속의 '아름다움'을 붙잡아 잠시나마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것. 마치 '위안'이란 실체 없는 말을 붙잡아 사진 속에 오롯이 담아낸 것처럼. 김영갑의 사진 속 구름을 봤다. 눈을 감으니 제주의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손으로 만지면 바람의 입술 위에 가 닿을 것 같다. 기어이 바람의 냄새를 맡기 전, 아무래도 나는 두모악으로 떠나야겠다.

●김영갑―평생 제주의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