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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벽돌책]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앤 셜 리 2017. 12. 17. 17:35

비밀을 품고 살았던 은둔의 예술가들이 있다. 비비언 마이어는 보모와 가정부로 일하며 수십만 장이나 되는 사진을 찍었지만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다. 헨리 다거는 병원 잡역부로 일하며 1만5000쪽이 넘는 방대한 서사시를 쓰고 삽화 수백 장을 몰래 그렸다. 그런 종류의 낯설고 집요한 창조성이 있는 것 같다.

고(故) 박지리 작가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그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않았고, 인터뷰와 행사를 피했다. 출판사 전화나 메일에도 몇 달씩 답하지 않곤 했다. 856쪽짜리 소설을 내면서 '작가의 말' 쓰기를 거부했고, 책이 나오고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일이었고, 작가는 31세였다.

그 작품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아주 낯설고 집요한 소설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출신 지역에 따른 신분제가 엄격히 유지되는 가상 세계에서, 엘리트 학교에 다니는 십 대 주인공이 과거의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헝거 게임'유의 영 어덜트 SF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설정은 비슷할지 몰라도 이야기는 그 문법에서 한참 멀다.

모험극이라기보다는 사변 소설이며, 분위기는 대단히 어둡다. 3대에 걸친 악(惡)의 기원을 쫓아 심연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뒤를 독자들이 고통스럽게 따라 걷게 만든다. 청소년 소설로 분류하기도, 성장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망설여진다. '현실 비판, 사회 비판'이라는 전천후 독법에도 썩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해설 없이도 그 자체로 강렬하다.

책의 정서적·물리적 무게도 그렇거니와, 영미식 이름 등장인물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호한 시대 배경, 독자의 호오가 뚜렷이 갈릴 결말 같은 요소는 '최근 한국 소설 트렌드'에 정면으로 맞선다. 돌연변이 같다. 이런 괴물 같은 소설을 무슨 계기로 어떻게 쓴 건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사계절출판사의 김태희 편집장은 "작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면 거의 대답하지 않았고 가끔 '그냥요'라고만 했다"고 전했다.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가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도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박지리 작가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6년 동안 '한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색깔의 장편소설 네 편과 단편 한 편을 냈다. 그 글을 모두 사계절출판사에서 김 편집장을 통해 발표했다. 출판사와 편집부는 작가를 진심으로 아꼈고, 지난해에는 고인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충분히 홍보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런 칼럼을 통해서라도 흔치 않은 작품이 자신을 알아봐 줄 독자를 더 만나면 좋겠다. 고인의 유작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곧 출간될 예정이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