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신문스크랩

먼지 같은 삶… 지독한 염세의 노래가 삶을 환하게 만들다

앤 셜 리 2017. 12. 17. 17:22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윤심덕 '사의 찬미' 중

삶은 기진해 결국 멈춘다. 시간에 밀려 가차 없이 정리된다. 시간의 절벽 앞에 서면 용서 못 하고 이해 못 할 일이 없다. 덧없음과 연민은 동전의 앞뒤 같은 것이다. 뒤죽박죽된 욕망도 언젠가 잠들고, 관계의 괴로움도 곧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때론 삶의 위안이 된다.

우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어둡고 불온한 노래 '사의 찬미'를 들으면 양가적(兩價的) 감정이 생긴다. 제목부터 섬뜩하다. 대놓고 죽음을 찬미한다니. 세상의 모든 삶을 무화(無化)시키고 말 기세다. 노래의 주인공 윤심덕의 목소리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허무의 날이 퍼렇게 서 있다. 이 지독한 염세의 노래를 듣고 나면 죽음에의 충동이 생기기보다 삶이 가볍고 환해진다. 눈물을 쏟은 후 바닥을 딛고 일어설 힘이 생기듯 이 처연한 노래에 빠졌다 나오면 삶의 잔가지들이 떨어져 나가고 중요하고 큰 것들만 보인다. 그리하여 삶의 투지를 새롭게 다질 수 있게 된다. 염세의 역설적 힘이다.

윤심덕에게 인생은 '광막한 광야' '험악한 고해'다. 그가 노래를 발표한 1926년으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렇다. 윤심덕이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가는 곳 어디"며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고. 총체성이 사라진 세계에 그 답이 있을 리 없다. 질문은 그저 허무를 채색한 넋두리일 뿐이다. 후렴인 B파트는 신파와 염세 범벅이다. 윤심덕 이후에 나온 많은 리메이크 버전들에선 이 부분이 빠졌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겉치장이라곤 없는 이 최루성 구절이 가슴에 머무는 동안 삶은 방향을 잃고 잠시 헛돈다.

가사 중 문학적 순도가 가장 높은 곳은 2절이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라고 노래할 때 찬란한 영광과 불우한 절망도 그저 티끌 같은 생의 한 단면으로 휙 스쳐 지나간다. 찰리 채플린 말처럼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리고 처절하면서도 빛나는 이 문장.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삶은 무망하지만 우린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관성에 끌려 맹렬히 달린다. 다투고 시기하고 우쭐하다 자학한다. 그 미련하고 위험한 욕망의 질주를 '칼 위의 춤'으로 압축해내며 시적 도약을 이룬다. 그 아슬한 춤이 멈추면 삶은 비로소 선물처럼 평화를 얻는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발표하기 직전 유부남이었던 연인 김우진과 함께 관부연락선에서 대한해협으로 몸을 던졌다. 노래와 삶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 드문 일화는 너무 극적이어서 도무지 현실 같지 않다. 이 희대의 스캔들이 노래를 신화화해 음반을 엄청난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음악평론가 강헌은 '음반사가 기획한 자살'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노래로 인해 한국 대중음악의 음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멜로디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에서 빌려 왔으며, 작사가는 미상이다. 윤심덕 혹은 김우진으로 추정할 뿐이다.

1990년 2월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카메라를 반대로 돌려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너무 희미해서 보이지조차 않는 그 지구의 모습을 두고 과학자 칼 세이건은 이렇게 적었다.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시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연인들, 어머니와 아버지, 희망에 찬 아이, 부패한 정치가, 수퍼스타들, 위대한 지도자들,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이 우주의 뜬 먼지 같은 곳에 살았다.'

인생은 아주 멀리서 보면 희극조차 되지 않는 사소한 해프닝일 뿐이다. 지금, 먼지 같은 삶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