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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앤 셜 리 2023. 7. 17. 18:45



예전에 어느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가장 감명 깊은 영화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 경우 답은 1959년 제작된 미국 영화 '벤허'였습니다. 찰턴 헤스턴 등 출연 배우들의 명연기와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주 등 스펙터클한 장면뿐 아니라 가슴 저미는 사랑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 예술성과 오락성을 두루 갖춘 명작입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조차도 시사회를 마치고 "하나님,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나요?"라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아카데미상도 11개 부문이나 수상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의 영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벤허' 외에도 잊히지 않는 영화가 몇 편 더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48년 이탈리아 비토리아 데시카 감독이 만든 '자전거 도둑'입니다. '벤허'와는 달리 남자 주연배우가 길거리 캐스팅으로 등용된 무명 배우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세트장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피폐해진 로마 시내를 촬영 장소로 한 흑백영화이지만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는 명작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인 안토니오는 실직 중 겨우 일자리를 얻습니다. 거리에 벽보를 붙이는 일인데 그 일에는 자전거가 꼭 필요합니다. 아내가 전당포에 자신의 물건을 맡기고 마련해준 자전거를 그만 도둑맞고 맙니다. 자전거를 찾으러 백방으로 돌아다니다 도둑으로 보이는 사람을 잡지만 정작 자전거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낙담한 그는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이를 훔치다가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붙들립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도둑이라 비난하며 경찰에 넘기라고 소리치는 등 그는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 장면을 6, 7세 어린 아들 부르노가 목격합니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군중 속에 섞여 있는 아들과 눈길이 마주칩니다. 난처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다행히 주인의 용서로 풀려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들은 아버지 곁에 다가가 슬그머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피폐한 로마 거리를 말없이 걸어가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아내와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고단한 삶의 현실과 따뜻한 가족애와 희망을 사실적으로 그린,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로 평가를 받습니다.

영화 '자전거 도둑'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법연수생 시절 연수 일환으로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직무대리로 부임한 첫날 배당받은 사건입니다. 14세를 갓 넘긴 소년은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겨울철 광주천을 따라 찬 바람 속에 먼 공장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자전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발견하고 훔쳤다가 이내 붙잡히고 맙니다. 포승줄에 묶여 사무실로 들어선 소년은 창백한 얼굴에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릴 적 참새를 잡아 손안에 쥐었을 때 팔딱거리는 참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던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순간 실수로 저지른 범행이니 용서하여 기소유예로 석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도 검사에게 제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자전거 절도는 구속 기소하는 것이 실무 처리 기준이고, 그래서 윗분들이 석방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빨리 기소하여 법원에서 용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소년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미안해하는 지도 검사의 설득에 따라 곧바로 기소하였습니다. 소년에게는, 순간 실수이고 반성하고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될 사건이 아니고 법원에서도 용서해줄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견디라고 당부하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소년을 더 위로해 줄 것이 없나 생각하다가, 제가 갖고 있던 껌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소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보고 난 뒤, 그리고 이 사건을 경험한 뒤로는 자전거 도둑이라는 말은 제게는 범죄라기보다 삶의 고단함과 안타까움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기고자 : 김황식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