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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같은 내 책들, 도서관도 안받아준다니…" 강우량 기자

앤 셜 리 2022. 11. 25. 18:12

애서가들 "내 지적 자산 기증하고 싶어도 받아줄 곳 없다" 한탄

작년 8월 말 수도권 한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한 A교수는 퇴직 당시 30년 넘게 연구실에 뒀던 장서 1만여 권을 정리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집에 가져가기엔 워낙 방대한 양이었던 탓에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 뒤 지역 공공 도서관은 물론, 자기가 사는 아파트 내 도서관에도 제안했는데 줄줄이 거절을 당했다. 그는 "학교 도서관은 여유 공간이 없어 퇴직하는 교수의 책은 안 받는다 하고, 공공 도서관과 사설 도서관은 '신간'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며 "한 사람이 평생 축적한 서적들은 사회문화적 자산인데, 이 책들을 보낼 곳이 없다는 게 무척 난처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제자들과 학생들, 교직원들에게 책을 나눠준 후 남은 1000여 권은 연구실을 정리하는 미화원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고 한다.

베이비부머(1945~1965년 출생)가 대거 은퇴하면서 평생 책을 가까이해 온 애서가(愛書家)들이 소장해 온 책을 처분하느라 진땀을 빼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장년의 애서가들은 "도저히 책을 종이 쓰레기로 분리 배출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평생 자신들을 성장시켜 온 소중한 자산이라서다. 누군가와 책을 나누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우선 전국 곳곳의 도서관 역시 수십년간 각종 자료를 축적해온 탓에 포화 상태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 따르면 지난 2017년 1년간 전국 도서관에서 폐기된 도서 수는 59만여 권 수준이었으나 작년까지 165만권으로 늘어났다. 낡아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책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데다 시민들이 많이 찾는 새 책 비치도 늘면서 도서관 공간 자체가 부족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들은 기증받는 도서 기준을 '발간된 지 5년 이하인 도서' 등으로 설정한 상태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작년 8월 말 정년퇴직을 한 김모 명예교수는 연구실을 정리하면서 평생 모아 온 연구 자료와 서적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그는 "우리 대학은 물론, 인근 대학도 도서 기증을 받을 여유가 없다고 하더라"며 "당시 청소하시는 분들께 10만원을 드리고 몽땅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리어카 3대 분량이 나왔다"고 했다.

오래된 책을 사줬던 헌책방들도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 헌책방 거리였던 서울 동대문구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경우 20여 년 전 100여 곳에 달하던 헌책방 수가 현재 17곳으로 줄었다. 한 헌책방 사장은 "전자책과 온라인 중고서점이 들어서면서 손님이 크게 줄었다"면서 "별도 책 수거 업체가 가져오는 상품성 있는 책 외에 손님들이 개별적으로 가져오는 책들은 대부분 돌려보낸다"고 했다.

애서가들은 주변 지인들에게 자기 책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지만 이런 부탁이 민폐가 되기도 한다. 수십년 된 책들은 누렇게 변색되거나 곰팡이가 슬어 다시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 차량을 동원해 수십~수백권을 받아가는 번거로움도 큰 탓이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동양 고전 연구자 이모(60)씨는 "지난 8월 개인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평생 수집해온 서적 3000권을 기증하려 했는데, 모교를 포함해 어느 곳도 받아주지 않았다"며 "도저히 그냥 버릴 수는 없어 지인 물류 창고에 책을 쌓아뒀다"고 했다.

일반 시민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요즘 젊은 층은 온라인 중고서점을 통해 소장했던 책을 파는데, 이런 곳도 되팔 수 있을 만큼 새 책에 가깝지 않으면 받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층은 이사도 자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책이 짐이 되는 탓에 책 소장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이용재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정말 중요한 책이 보존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지역마다 공동 보존 서고와 소규모 공공 도서관을 확충해 도서 보관을 더 늘려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