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29 20:52
- 수필가 피천득(97)은 늘 한 손으로 원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말년을 보냈던 서울 반포동 자택 서재에 가 본 문인들은 모두 기억한다. 그가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라고 가리켰던 그 사진 혹은 그림들 속의 주인공들이 누구였던가. 우선 먼저, 시인 예이츠 등등 영국 낭만주의 시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리고 사진 속에 없지만,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라는 존재의 느낌…. 금아(琴兒)라는 피천득의 호는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금아(琴兒)라는 호는 춘원 선생이 지어주셨는데, 내 나이 열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얘기를 들으시고는 저 보고 영원히 어머니의 아이처럼 맑게 살라는 뜻을 담으셨던 것 같았어요”라고 고인은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수필가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모성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바탕으로, 모성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아름다움 앞에서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비애를 평이하면서 감성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그의 수필은 사실은 산문으로 구성된 시에 가까웠다.
그는 “시는 산호이고 수필은 진주라고 생각해왔어요. 깊은 바닷속에 있는 산호와 진주를 캐 내지는 못한 채 젖은 모래 위에서 조가비와 조약돌을 줍듯 글을 써온 내 인생에 나는 다 만족하고 있어요”라고 그는 늘 생전에 말해왔다. 워낙 연로했기에 문단에서는 해마다 그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그는 늘 새해 인사를 가는 후배 문인들 앞에서 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건강을 과시했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타계는 예상을 초월하는 평상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단의 첫 반응이다.
피천득은 한국 영문학계의 1세대 학자이기도 했지만, 정감어린 한국어로 구성된 산문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하는 그의 수필은 한국어의 우아함과 날렵함을 가장 잘 결합한 글로 남아있다.
그 글은 흔히 수필의 대표적 산문으로 기억되지만, 그 글이 감동의 파장을 남기는 까닭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던 사람이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모성의 극치이기 때문에 마치 시처럼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피천득의 수필은 개인사의 고백이지만, 감동의 여백으로 인해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이 그 글의 공간 속에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던 넉넉한 미학의 품을 지녔던 것이다.
피천득은 시 ‘가지 않은 길’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좋아했다. 문학이란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생처럼 가지 않은 길을 추체험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했던 그는 문학이 제공하는 또 다른 체험의 영역을 사랑했다.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던 그는 말년에도 버스를 타고 홀로 지인들을 만나고 서점에 책을 사러 가고, 동숭동 카페에 앉아 차를 마셨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고맙다”라고.
'신문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설악산의 ‘落僧’ 오현스님 (0) | 2010.06.14 |
---|---|
風流탑골 (0) | 2010.06.14 |
싱가포르 공무원 왜 대접받나 (0) | 2010.06.14 |
‘광란의 禁酒法’과 똑 닮은 ‘3不’ (0) | 2010.06.14 |
인도공과대학 (0) | 2010.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