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뚱이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사흘 이내 썩어 화장하고 묻어버려요. 뼈와 살은 흙으로, 대소변은 물로, 호흡은 바람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갑니다. 본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거든. 하지만 주인공인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滅)한 후에도 항시 여여(如如)하게 있습니다. 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습니다."
절 뜰 위로 연등(燃燈)들이 둥둥 떴다. 바닷바람이 부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한 시간째 양반다리로 앉아 있는 중이었다.
진제(眞際) 스님(동화사·해운정사 조실)은 "하하하" 웃었으나, 나는 참호 속에 갇혀 악전고투하는 기분이었다. 불교계에서 '남 진제 북 송담(인천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다. 내게 익숙한 분석과 논리의 말을 선(禪)은 우습게 본다.
―깨달음이란 '참나'를 보는 것입니까?
"그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이 몸뚱이는 썩어 없어지니 '참나'가 아니다. 이 몸 부모에게 받기 전 어떤 것이 '참나'던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를 아셔가지고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 되었고, 모든 스님네도 이를 알아가지고 도인이 됐지요."
―설령 '참나'를 찾은들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나'라는 허세, 시기, 질투, 욕망, 공포, 불안 등에 찌들어 정신없이 생을 살다가 죽는 게 중생이거든.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갖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이루고 삼으려고 하니,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고, 대통령·장관을 지내도 번뇌와 갈등은 제거할 수가 없어요. '참나'를 알게 되면 이런 중생의 용심(用心: 마음 씀)이 없어집니다. 모든 세상이 나로 더불어 한 집이요, 나로 더불어 한 몸인데, 내가 더 가질 필요가 없단 말이거든. 다같이 한 몸뚱이인데."
―그렇다면 큰스님의 '참나'는 무엇입니까?
"하하하. 차(茶) 한 잔 들어보세요."
이 무슨 말씀인가. 나는 찻잔을 들고서 "지금 육신이 없어지면 저 자신도 소멸되니, 저의 '참나'는 오직 여기 앉아 있는 이 모습입니다"라고 말했다. 일상의 어법으로 끌어오려고 했지만, 그는 "하하하" 웃었다.
"그래, 맛을 잘 보았소?"
―신문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독자가 이해를 못 하는 기사는 그 기사를 쓴 기자도 사실 잘 모르고 쓴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높으신 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나면 그 모호함이 이와 같습니다.
"진리의 세계란 말로써 다 전할 수 없으니…. 내가 그걸 잡아줘도 모르거든."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만, '참나'의 정체가 뭡니까?
"'참나'의 정체라? 하하하. 해운대 앞바다 물을 한 입에 다 마셔 올 것 같으면 그대를 향해 일러주리라. '참나'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보게 됩니다."
그는 스무살 때 출가했다. 오촌 당숙을 따라 동네에서 십리쯤 떨어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석우(石友) 선사(조계종 종정 역임)를 만났다. 친견하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 안 나온 셈치고 도를 한번 닦아보는 게 어떻겠는가?"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도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네."
그 한마디 말에 감화돼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다는데 중놀이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부모와 상의한 뒤 행장을 꾸렸다고 한다.
―큰스님께서는 어떤 욕망에 휩싸여본 적이 없습니까?
"나는 참선해서 도를 뚫어야겠다, 알아야겠다, 거기에 심취가 돼서 중놀이를 했습니다. 스물여섯살 때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점검받겠다고 팔공산의 파계사로 성철(性徹) 선사에게 가니 '나는 몰라, 나는 몰라'하며 응대를 안 해요.
그래서 쌍벽을 이루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갔어요. 대뜸 '일러도 삼십 방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이다'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바른 답을 해도 삼십 방 맞고, 못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는 거지요. 이에 우물쭈물하니 '그것도 척 못 나오면서 뭘 알았다고 하느냐?'며 쫓았습니다."
그 뒤 눈 덮인 오대산에 들어가 공부하는데, "일생을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향곡 선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 화두를 타파하기 전까지는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겠습니다. 생사를 떼어놓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이런 화두를 내렸다.
"중국의 향엄 선사께서 법문하시기를 높은 나무 위에 입으로 매달려 있을 때 밑에 지나가는 이가 '달마 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까닭이 무엇인고?'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하려는고?"
그가 2년5개월 걸려 이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해결하자, 다른 화두가 주어져 또 5년을 씨름했다.
―그렇게 해서 속세 나이 서른셋에 도를 깨쳤다고 들었습니다.
"여름 해제일에 대중을 위해서 향곡 선사께서 법상(法床)에 오르셨어요. 제가 예를 올리고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알지 못하는 심오한 일구(一句)를 일러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9는 81이니라.' '이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다 아신 답입니다.' '그러면 66은 36이니라.'
제가 가타부타 말을 안 하고 큰절을 하고 나와버렸어요. 그러자 선사께서 '오늘 법문은 이걸로 끝'이라며 일어섰어요."
―이게 다 무슨 뜻입니까?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의 도입니다.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한번 도(道)를 깨치게 되면 그걸로 평생을 갑니까? 흔들림이 없습니까?
"허공은 사시사철 허공이지 어디 변합니까? 태풍이 아무리 불고 풍우가 쳐도 그 위에 허공은 항시 밝아 있듯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금생(今生)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 가지요. 나고 날 적마다 가지요."
―깨닫고 나서 보니까 세상이 별거 아니구나, 삶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니. 세상 온 천지가 진리의 꽃이구나. 하하하, 진리를 찾아서 몇 생을, 몇 년을 헤맸는데, 바로 목전(目前)에 다 진리가 아님이 없구나. 그런데 이것은 아는 자만이 알지 다 모릅니다."
―큰스님은 진리를 보고 계시니 홀로 즐길 수 있지만, 일반 중생들은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그런 낙을 누리질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은 과보(果報)로 받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출세를 해야지, 돈을 많이 벌어야지, 호화로운 생활을 해야지, 남보다 더 구하려는 욕망에서 무한한 고통이 머리를 다투고 일어납니다. 출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도 좋은 인연을 좇아서 좋은 설교를 듣고, 미덕을 베풀고, 하루하루 수행하는 거기에, 삶이 윤택해지고 마음의 번뇌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절집을 먹여 살리는 것은 그렇게 아등바등 경쟁하고 용심을 내는 중생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하하하. 그 대가로 바른 용심과 바른 행동, 복이 되고 덕이 되는 지혜와 법을 가르쳐 보시를 하지 않습니까?"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관심 있게 지켜보십니까?
"성속(聖俗)이 둘이 아니고, 어디에 있든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입니다. 나는 참의심을 갖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습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깨달은 자의 본분입니다."
―정치권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왜 늘 우리를 실망시킬까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오셨을 때 '대인(大人)은 취사(取捨: 취하고 버림)가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당 안에서도 박근혜측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원수가 서로 만난 듯 반대에 반대를 합니다. 너니, 나니 하는 허상(人我相)에 매인 이런 소인배들은 방망이(棒)로 때려서라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조차 명성이나 권력, 사적 이해에 집착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속심(俗心)이 그대로 차 있어서 그래요. 먹물옷을 입었다고 다 중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을 가져야지 허깨비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응당 서릿발같이 계율을 지키고 내실 있는 수행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궁극점은 죽음이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도를 알면 죽음은 '환화(幻花)'입니다. 허공 꽃, 눈을 때리면 번쩍하고 허공 꽃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실제 있는 게 아니거든. 일시적으로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지요."
―원래 산 것도 아니니 죽은 것도 아니라는 뜻 같은데, 그러면 왜 큰스님이 열반할 때 제자들은 그렇게 슬퍼합니까?
"그것은 중생의 틀을 못 벗어서 그렇지, 하하하. 두려워하는 것은 도를 몰라서 그래요. 도를 모르니까."
―지금도 새벽 2시 반에 기상한다고 들었습니다.
"9시 반에 자고 새벽 2시 반에 일어납니다. 새벽 3시에 예불을 모시니까, 어른의 일거일동에 다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가 시집살이를 해야 대중들이 따라오거든. 하하하."
―이번 주말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 중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백화쟁발위수개(百花爭發爲誰開) 자고제처백화향(啼處百花香)이라. 숱한 꽃들이 피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자고새 우는 곳에 온통 꽃들의 향기네. 부처님 오신 날에 꽃들을 구경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날 승용차로 5시간 반 걸려 스님을 만난 뒤 다시 5시간 반 걸려 상경했다. 긴 하루였다.
선임기자
'신문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평로]상복은 검고 국화는 희다 (0) | 2010.09.06 |
---|---|
[유홍준의 국보순례](9)景福宮의 殯殿 (0) | 2010.09.06 |
• 빌 게이츠 아버지가 말하는 아들 (0) | 2010.09.06 |
적선의 방법 (0) | 2010.09.06 |
[조용헌 살롱](669) 돈 씀씀이 (0) | 2010.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