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어머니는 아들이 6개월 되던 달에 남편 초상을 치렀다. 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 결핵균이었다. 아기 때부터 결핵성 관절염을 앓아 제대로 걸어 본 적이 없다. 지체장애 3급이다. 그를 키운 건 어머니 대신 길바닥이었다. 거기에서 자랐고, 거기서 망가졌으며, 거기서 성공했다.
그래도 이 남자의 마음속엔 의문이 남아 있었다. '내 어머니는 왜 서른에 혼자 몸이 됐을까, 나는 어쩌다 평생 장애인으로 살게 됐을까.' 명리학을 공부했다. 자기 사주를 넣어봤다. 거기엔 그가 장애인이 될 팔자라는 얘긴 없었다. 허탕인 거다. 그래도 남자는 계속 점을 공부하고 점을 보고 있다.
이철용(63)은 수식어가 많은 사람이다. 깡패, 빈민운동가, 이른바 '배설'문학의 붐을 일으킨 작가, 장애인 최초의 지역구 국회의원, 가수…. 그리고 4년 전부터는 거리의 삶을 정리하고, 이제 서울 안국동에 있는 점집 '통(通)'에 틀어박혀 4년째 오는 사람을 맞고 있다. 스스로는 '희망 디자이너'라고 칭한다.
거리에서 인생을 배우다
"초등학교 적 어느 날, 학교 복도를 걸어가는데 애들이 박장대소하고 난리가 났더라. 내 걸음걸이 때문에 웃는 줄 알았다. 그런데 뒤를 보니, 따라오던 선생이 내 걸음걸이를 흉내 내고 있던 거다. 나는 그 선생 이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송○○." 종암초등학교에 다니던 절름발이 소년의 심성은 날로 흉포해질 수밖에 없었다.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계가 깨지는 바람에 빚잔치를 한 후 아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고, 그는 외가로 보내졌지만,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는 종암초등학교로 끝냈다. 거리를 쏘다니다 비슷한 처지의 애들을 만났고, 형사계장의 아들을 흉기로 위협해 돈을 뺏었다가 소년원과 인연을 맺었다. 아침 먹으면 저녁 걱정하고, 저녁 먹으면 잠잘 곳 걱정하던 때였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깡패가 될 수 있나.
"과부와 유부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나? 과부가 이긴다. 어릴 때부터 신체가 열등하니까 난폭해지고, 그러다 싸우면 무기를 들었다. 보복의 명수로 소문나야 두드려맞지 않는다 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살았다. 거리에서는 소문이 빨리 난다. 부하들 몰고 다닐 때는 키 큰 애들을 앞으로, 옆으로 붙이고 나는 그들 속에서 걸어갔다. 내가 걷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열등감에서 나온 일종의 연출이었다."
―빈민운동은 어떻게 하게 됐나.
"청계천에서 구두 닦고, 김밥 파는 아이들 100명쯤 거느리고 있었다. 저 사람한테 가면 경찰서에 잡혀가도 잘 빠져나오고, 돈도 비교적 잘 준다는 소문이 나서 내 밑으로 오는 애들이 많았다. 그러다 그냥 할 게 아니라 애들 공부 좀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72년부터 야학을 시작해, 74년에는 '은성학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정식으로 야학을 열었다. 서울대 등 명문대 학생들이 야학 선생으로 왔다. 빈민운동가인 허병섭 목사가 75년 성경책을 줘서 읽기 시작했다. 거지 왕, 예수라는 사나이가 멋있었다. 야학만 해도 경찰에 끌려갈 때였지만, 돈이 나의 수호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81년 장로 안수를 받고 선교활동을 하면서, 내 과거를 참회하는 기도도 많이 했다."
―죄 안 짓고 조용히 사는 사람, 죄짓고 참회하는 사람 중 종교는 후자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종교의 아이러니 아닌가.
"극적이니까.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가면 크게 가듯이 울림이 더 큰 거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귀엽게 보는 거다."
―많은 사람이 영화 '어둠의 자식들'을 봤다. 윤락녀를 다룬 영화여서 당시 꽤 충격이었다. 그런데 1980년 처음 나온 소설 '어둠의 자식들'은 황석영 작가의 소설로 아는 사람도 아직 꽤 있더라.
"빈민운동을 하다 수배돼서 부산에 숨어 있을 때, 어느 모임에서 황석영씨를 만났다. 그가 쓴 책을 읽어봤다. '객지'라고.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막노동이라면 나도 좀 해봤는데, 이런 게 소설이라면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해남으로 은신처를 옮겨, 거기서 대학 노트 1000장 분량으로 편지 식으로 써내려갔다. 얼마 후, 이해찬(전 총리)씨가 당시 운영하던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이 보더니 당장 책을 내자고 하더라. 황석영씨에게 손을 봐달라고 부탁해놨다. 나는 계속 떠도느라 몰랐는데, 김영동(국악연주가)이 그게 황석영의 책으로 나왔다고 하더라. 얼마 후 만나서 정정했다."
―'이동철'(필명) 이름으로 나온 게 다음 해인데….
"여러 사정이 있었다. 그래도 인세는 계속 내가 받았다."
―황 작가가 가필한 부분이 얼마나 되나.
"30% 정도라 생각한다. 그 얘긴 그만했으면 좋겠다. 우리 둘 사이엔 오해 없다."
-'어둠의 자식들', 그리고 그 속편 격인 '꼬방동네 사람들'은 빈민 속에서 체득하지 않으면 나오지 못할 작품인데, 실제로 빈민운동에서 어떤 일을 했나.
"운동에는 조직가가 있고, 앞장서 연설을 하는 리더가 있다. 나는 목동·종암동 같은 동네에서 문제를 발굴하고 거기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꾸려주고, 리더를 앞세우는 일종의 배후활동을 했다. 남의 눈에 안 띄게 누룩처럼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첩으로 몰려 고문도 받아보고 경찰에도 너무 많이 알려져 조직가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평민당에서 나를 불렀다. 당시 '도봉을'에서 리어카 10대에 책을 담아 싣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재미있게 했다. 간첩처럼 접선하는 힘든 빈민운동이 아니라, 국회에서 입법활동을 하니 훨씬 파급력이 있고, 실질적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었던 점이 좋더라."
―이후 공천을 못 받고 이리저리 당을 떠돌았다.
"운동을 하면서 정권 사람들에게 많이 맞았다. 죽을 것처럼 맞았다. 그러나 내가 특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1980년 5월 광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광주 청문회'가 열리는데, 그저 면죄부 주고 넘어가는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1989년 12월 31일, 청문회장에서 '전두환 살인마'라고 외쳤다. 그날 밤부터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지내다 1월 3일 돌아왔더니 김대중 의원이 나를 찾았다더라. 집으로 갔더니 '당신 왜 그랬어' 하면서 노발대발하더라. 그가 화내는 건 처음 봤다. 내가 안경 벗으면서 '그게 왜 잘못이냐'고 대들었다. 그 이후로 요즘 말로 왕따당했다."
―측근들은 이유를 설명하던가.
"아무 설명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공천 못 받았나.
"선거 후, 91년 시·구의원 공천자를 고르는데, 여기저기서 낙하산 명단이 내려오더라. 열받아서 이해찬 의원이랑 둘이서 탈당했다. DJ측이 꼬마민주당이랑 합당할 당시, 주위에서 '노무현을 찾아가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난 안 갔다. 그쪽에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그 길로 영원히 정계와는 인연이 끝이었나.
"아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에서 '이철용에게 전국구라도 주자'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민단체로 구성된 총선연대의 공천반대인사 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랐다. 기업에서 2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기업에서 직접 장애인단체에 준 돈이었다. 내가 길길이 뛰었더니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설명과 함께 2차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긴 했다. 하지만 뭐 그걸로…."(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다)
―억울했다면 이후 바로 잡았어야 하지 않는가.
"이후 '밤길 조심해라, 내가 잊지 않고 있다'고 떠들었는데, 작년에 최열(당시 환경연합)씨, 박원순(당시 참여연대)씨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누가 그 명단 내려 보냈느냐고 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하더라. 하지만 난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 의심을 풀지 않고 있다." ('미안하다'는 부분과 관련, 최열씨는 2일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만나서 미안하다고 했다'고 말했고, 박원순씨는 '노 코멘트 하겠다'고 했다)
―13대 당선된 이후, 14, 16, 17대 선거에 나왔다 낙방했다. 정치에 미련이 있었던가.
"미련은 없다. 정치를 했던 건 후회한다. 빈민운동이나 계속했으면 그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점에 빠지다
―빈민운동을 하면서 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둘이 무슨 관계인가.
"운동을 하다 보니 어느덧 자리에 취하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더라. 불특정다수가 아니라 한명 한명에게 집중하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빈민 운동할 때, 1인 1기(一人一技)를 주장했다. 한 사람이 기술 한가지씩 익혀 현장에 달려가야 한다는 거다. 주머니에 파스 한 장이라도 넣고 다니며 허리 아픈 할머니에게 붙여주라는 게 내 주장이었다. 나도 이발기술, 침 기술을 배웠다. 소리만 지르는 게 운동인가. 내 운명에 대한 의문도 풀고 싶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명리학을 공부했다."
―거기 답이 나와 있던가.
"맞지 않더라. 사주 책은 다 농경시대 쓰인 책이다. 옛날에는 불구가 될 이유가 전쟁이나 천재지변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통사고 약물중독 산업재해 등 다른 환경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음양오행을 터득하는 일을 새로 했다. 거기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건 불법적 요소가 있는 일이었는데…. 내가 국회에서 보사위에 있을 때, 간호사, 공단 등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약 8000명의 정보를 입수했다. 선천적 장애, 정신병, 교통사고, 산업재해 환자 등 각종 환자의 기록을 들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사주(태어난 해, 월, 일, 시)까지 완벽하게 확보한 것은 1300건이 됐다. 이 데이터와 각 해에 일어난 사건, 사고, 역학을 합쳐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걸로 풀어보니 얼추 내 운명이 나오더라. 이 집을 여니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자기 데이터를 알려 주니 더욱 시스템이 공고해지고 있다. 점집 열고 현재까지 데이터양이 3000건으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결국은 통계학 아닌가.
"맞다. 이건 일종의 행동과학에 관한 통계학이다. 사주원리만 배운 사람은 '숙명'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어떻게 푸는가가 더 중요하다. 같은 사주풀이가 나와도, 사회주의에 경도됐으면 사회구조에만 원인을 돌리고, 돈에만 관심이 있으면 돈복, 남편복 같은 기준만 적용하게 된다. 요즘 땅이 안 팔린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사주뿐 아니라 부동산정책, 세금정책도 함께 봐야 답이 나오는 거다."
―인간의 삶이란 다양한데, 특수성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족집게 도사라는 건 없다. 70~80% 정도만 맞는다. 기본적으로 이런 추세가 있으니, 이러저러한 것을 조심해서 나쁜 것을 피하라는 생활의 관리학에 해당한다."
―알고 피할 수 있으면 그 사주팔자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잖은가.
"나는 사주는 인생에서 상위개념이 아니라 하위개념이라고 말한다. 사주보다 상위개념은 언행·식탐·분노·욕망의 절제, 그리고 웃음과 보시(베풂)다. 사주는 단지 일기예보에 불과하다. 인공위성으로 예보 확률을 높이듯, 사주 역시 데이터를 더해 확률을 높일 뿐이다."
―그건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7 중죄' '7대 죄악'을 피하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 인생의 그저 일반론 아닌가.
"일본 최고의 역술인도 수십년의 공부를 마친 후 '절제하면 사주 볼 필요 없다'고 얘기했다고 하지 않나. 나 역시 너무 믿지 말라고 얘기한다. 사주 공부가 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