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전달된 우편물 중에 시집 한 권이 있었다. 제목은 '추억(追憶)'. 세련된 시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신(韓迅)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매스컴이 주목할 만한 약력도 없었다. 이번이 7번째 시집이라고 했으니, 오랫동안 시는 썼지만 문단에서 인정을 못 받았던 게 틀림없다.
한 달쯤 지나 어느 한가한 오후였다. 밀쳐둔 시집을 넘기던 중, 내 머릿속으로 바람이 불어쳤다.
〈…증남아 대답해봐라 왜 대답이 없느냐 나는 너의 오빠고/ 너는 내 동생이다 네가 살아있다면 바로 대답해봐라/ 너는 북쪽에 있고 나는 남쪽에 있다 내가 지금 너한테/ 달려가고 싶어도 달려갈 수가 있느냐 네가 지금 오빠한테/ 달려오고 싶어도 달려올 수가 있느냐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느냐/ 38선을 그어놓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편지나 전화 하나도 할 수가 없는 나라 반세기 넘도록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호시탐탐 노리고만 있는/ 희한한 나라 이 나라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출판사에 알아보니, 여든 일곱살의 시인은 보청기를 끼고 있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집으로 찾아갔다. 얼굴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지만 단아함이 남아 있었다.
소통이 문제였다. 평상시 어조로 말을 붙였을 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질문할 때마다 목청을 높였다. 그는 귓전에 손을 갖다 댔다. 옆에 있던 사진기자도 힘껏 거들었다. 다행히 그는 질문을 알아들으면 말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내 형제가 아홉인데 '증남이'는 바로 아래 여동생입니다. 살아 있어도 여든살이 넘고, 아마 죽었을 겁니다. 서로 못 본 지 60년이 지났으니…."
―같이 지냈던 날들보다 떨어져 지낸 날들이 3배쯤 되는군요. 세월이 그렇게 흘렀으면 잊힐 만하지 않은가요?
"지난날을 모두 잊었다 싶었는데… 해가 갈수록 유난히 가슴을 찌르며 되살아나는 것들이 있어요.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가슴을 찌르며 되살아납니까?
"1·4후퇴 때 피란 나와 거제도에 잠시 머물 때 누이 남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도 혼자 따로 피란 나와 있었어요. 한 방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처남이 '아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더니 며칠 뒤 사라졌어요. 북으로 다시 올라갔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가지도 못하고, 편지 전화도 할 수 없으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고향은 함흥이다. 농사짓는 집에서 9남매의 둘째, 아들로서는 맏이로 출생했다.
"자전거를 타고 함흥 '만세교'를 건너 학교를 다녔습니다. 다리 밑으로 성천강이 흘렀어요. 뒤에는 반룡산이 있었고, 흰 갈매기떼가 날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어머니 경대(鏡臺) 앞에 앉아 긴 면도칼로 면도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다만 술을 좋아해서 눈 오는 날 장터에서 한잔하고 돌아오시다 눈 속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동상과 허리병으로 고생했어요. 제가 아버지의 등을 밟아드리면 참 좋아하고 기뻐했어요."
그는 5년제 함흥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 시절 38선이 그어졌다. 그는 중국으로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친구와 함께 일단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 뒤 인천에서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남으로 가는 기차의 지붕에 올라탔다. 철원역에서 내려 하룻밤 잔 뒤 다음날 38선을 넘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붙들렸다.
"인민재판을 받고 '월경(越境)미수 반동분자' 죄명으로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가죽띠와 몽둥이 매질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한쪽 귀가 고막 파열로 들리지 않게 됐습니다. 온몸에 시퍼런 멍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1년6월 형을 선고받았어요. 꽁보리밥덩이 하나, 멀건 국물, 단무지 김치 세 조각으로 지냈습니다. 당시 나보다 세 살 위 막내삼촌이 마을 노동당위원장이었어요. 어머니가 찾아가 '조카를 구해달라'고 사정하니 '그따위 반동분자놈 새끼는 당장 죽어도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김일성 생일 특사'로 반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는 취직도 어려웠고, 사람을 만나거나 여행하는 것도 통제받았다. 좌절과 울분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함흥사범 동기생 중 출세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흥남 제1여자중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오는데 미공군 B-29의 포격이 있었습니다. 내가 직접 포격을 겪은 것이지요. 방공호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났습니다. 그 뒤 40리나 떨어진 집까지 뛰어왔어요. 잡히면 인민군이나 노역으로 끌려갈 판이었습니다. 다락방과 벼낟가리에 숨어지냈습니다. 10월 초순 국군과 유엔군이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요. 그때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국군이 후퇴할 때 마을 주민들도 같이 따라나섰다. '흥남 철수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흥남항에서 10만5000명의 군인과 9만1000여명의 피란민, 차량 1만7500여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서 철수한 작전이다. 이 피란민 대열 속에 그가 있었다.
"우리 식구들 모두 피란짐을 꾸려 나왔어요. 그날 영하 50도는 됐을 겁니다. 얼마나 추웠던지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나왔어요. 그런데 흥남 부두까지 실어나를 트럭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나 혼자만 트럭에 올라타도록 했어요. 가족들은 처음에는 '어어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나중에는 울부짖었어요. 그 장면이 눈에 선해요. 기가 막힙니다. 그게 생이별이 됐으니."
―그렇게 생이별이 될 줄 전혀 몰랐습니까?
"지금은 전세가 불리해 국군이 후퇴하지만 석 달 뒤면 다시 돌아온다고 했어요. 트럭에 올라타면서 그 말에 다소 안심했어요. 부모님께 '석 달만 참고 계시라'고 외쳤습니다. 그 석 달이 60년이 넘었습니다."
―혼자 트럭에 올라탄 것에 대해 후회가 되는가요?
"남아 있었으면 공산 치하에 있는 겁니다. 아마 못 살아남았을 겁니다. 그래도 이런 생이별이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부모님과 같이 죽든지 살든지 할 걸 가끔 후회했습니다."
시집에는 이런 시가 나온다.
〈생일은 잊어도/ 내가 어떻게 그날을 잊으랴
내가 북녘땅 그곳에 부모 형제 모두 남겨두고/ 아니 북녘땅 그곳에 부모 형제 모두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남으로 피난 나온/ 그 날 1950년 12월 29일!
그때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고/ 그때 아무리 우리 피난민 수송편이 모자란다 해도/ 죽음을 각오하면 걸어서라도 가지 못할까/ 부모 형제 다 모시고 걸어서라도 자유를 찾아가지 못할까
아니면 아무리 적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라도/ 부모 형제랑 함께 그곳에 남아 생사를 같이할 것을/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부모형제 모두 그곳에 버린 채/ 혼자만 살겠다고 남으로 피난 나온 불효자식…〉
수송선은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고, 피란민들은 임시 수용됐다. 그 속에는 좌익분자들이 섞여 있었다. 헌병대와 방첩대에서 색출 작업을 벌였고, 그는 이 일을 도왔다.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이북에 가서 가족을 데려오려고 종군(從軍)했습니다. 문관으로 지원한 것이지요. 북진하는 부대를 따라 강원도 고성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고향에는 다시 갈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후방으로 내려와 '광주중앙포로수용소'에서 근무했다. 이곳에는 인민군 낙오자, 남한 각지에서 암약하던 적색분자, 빨치산, 공산주의에 물든 10대들이 수용돼 있었다. 많을 때는 1만명에 이르렀다. 그는 교화와 선도를 맡았다.
"어느날 10대 아이들 수십명이 한꺼번에 잡혀왔어요. 이들은 입산해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생포된 겁니다. 절반 이상이 여자였어요. 옷은 누더기고 신발은 없습니다. 손발이 동상에 걸려 있었어요. 거지 중 상거지였어요. 대부분 성병에도 걸려 있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을 이렇게 물들인 건 어른들이지요."
그 와중에도 시(詩)를 못 놓았다. 노산 이은상이 호남신문 사장으로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이 쓴 원고를 들고 찾아갔다. 이 인연으로 노산 부부를 '수양부모'로 모셨다. '깊이 숨겨두고 산 금반지'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1·4후퇴 때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언젠가 북에 들어가 어머니를 만나면 드린다고/ 생전 처음으로 두 돈쭝 금반지 하나를 장만하여 깊이/ 숨겨두고 살았다
그러다가 내가 있는 부대가 전라도 광주에 갔다/ 그때 나는 그곳에 서울에서 피난 나와 계시는 노산 선생님을/ 찾아가 뵈었다 나는 그분을 그때부터 스승 겸 수양아버지로/ 모시고 사모님을 수양어머니로 모셨다
그런데 하루는 서울 수복 후 서대문 현저동 산꼭대기에/ 누추한 방 하나를 세 얻어 사는 나에게 수양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나는 너무나도 고맙고 기뻐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숨겨두었던 금반지를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찾아오신 기념으로 수양어머니께 드렸다…〉
휴전이 될 무렵 그는 군을 떠났다. 잡지사에서 잠시 일했고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모두 잘 풀리지 않았다. 그 뒤로 서예학원을 차려 지금까지 '생계'로 삼았다. 피란민이라 나이 마흔이 다 돼서야 결혼했다. 의사·약사·교사 등 1남3녀를 뒀다.
그는 남쪽에서 살면서 이북에 두고온 가족을 잊지 못했지만, 한 번도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적이 없다.
―소식은 들었습니까?
"캐나다로 이민 간 외가 쪽 친척이 과거에 북한을 몇 번 방문했습니다. 우리 집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들 중 누구는 혜산, 누구는 청진, 누구는 평양에 산다고 했습니다. 동생들이 살아있어도 여든이 넘었을 텐데 지금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얼굴이라도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많이 울었습니다. 혼자 있다 보니까 왜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하지만 생이별은 살아서 한 번이면 됐지, 두 번 다시 할 수 없고 하지 못합니다. 만나고 이틀 뒤에 다시 갈라지는데 만나서 뭘 하겠습니까."
그는 작년에 TV로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시를 썼다.
〈금강산에선 지금 남북이산가족이 만나/ 서로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도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신청을 했더라면/ 나도 지금 저렇게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만나/ 기쁨의 눈물 흘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조금도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신청 안 한 것을/ 보십시오 저들은 모두 오늘은 저렇게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기껏해야 하루 이틀뿐/ 그다음은 또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그 슬픔 그 고통을 겪으며
나는 다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다시는 그런 이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실향민들이 이런 사연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서 죽었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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