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질병의 고통을 다루는 병원은 어디나 엄숙하다. 쾌유하여 나가는 환자와 의료진의 유쾌한 대화도 가끔 들리지만, 병원은 항상 묵직한 긴장이 흐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장한 공간이 호스피스 병동이다. 여기에는 완치되어 나가는 환자가 없다. 이곳을 다시 찾는 '단골 환자'도 없다. 누구나 한 번은 와야 하지만, 딱 한 번만 오는 곳이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어느 죽음도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겠지만, 호스피스 병동에도 나름의 '이벤트'가 있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병원들이 시행하는 이른바 '소원 들어주기' 프로그램들이다. 그중에서 기자가 최근 전해 듣고 본 '천상(天上) 여행 이벤트'는 환자 개개인이 살아온 삶의 행적만큼이나 다양했다.
구강암으로 고생했던 중년 주부는 암 덩어리가 코 뒤쪽과 입 천장을 뚫고 올라가 뇌로 번졌다. 시신경이 망가져 앞을 볼 수 없었다. 말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더는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가족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청각뿐이었다. 호스피스 의료진이 준비한 '천상(天上) 여행 이벤트'는 비올라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에게 비올라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자원봉사 실내악단의 작은 음악회에서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한 채 남편과 딸의 손을 꼭 잡고 온 청각을 동원해 비올라 연주를 들었다. 지상(地上)에서의 마지막 음악감상이었다. 그 편안한 선율 속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담도암과 투병했던 60대 여성의 소망은 가톨릭 신학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신부(神父)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아들이 캄보디아로 해외선교를 떠난 사이, 그녀의 병세는 점점 기울었다. 2개월 정도의 시한부 삶이 남았을 때쯤, 아들은 캄보디아에서 부제(副祭) 서품을 받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봐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복수가 차오른 상황에서 그녀 단독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료진이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챙기고 동행한 끝에, 어머니는 아들의 서품식에 참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와 이내 죽음을 맞았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치르는 눈물의 결혼식도 종종 일어나는 '축복의 이벤트'이다. 서로 사랑을 나눴던 연인이 불치의 병을 앓을 때, 그들은 죽음이 곧 갈라놓을 부부의 인연을 맺곤 한다. 이를 청하는 이도, 받아들이는 이도, 사랑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종종 비교적 몸 상태가 좋은 환자들과 함께 야외소풍을 나간다. 그러고는 풍선에 각자의 소원을 적어 날리는 이벤트를 갖는다. 그 속에는 각자 살아온 인생에 대한 애환과 회한이 묻어 있고, 자신이 떠나고 난 뒤 남은 가족들에 대한 바람이 담긴다. 일본에서 말기암 환자 1000여 명을 보낸 호스피스 전문가 오쓰 슈이치 박사가 쓴 책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를 보거나, 우리나라 호스피스 전문가가 수많은 환자를 접하며 전하는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을 보면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많은 날을 살면서 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다.
그 누구와 연애하지 못했거나 결혼하지 않았던 후회,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 자식들을 결혼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걱정, 고향을 찾아가지 않았거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나 가고 싶었던 곳을 여행하지 못했던 회한 등을 호소한다. 세세하게는 유산을 정리하지 않은 것, 장례식 준비를 해 놓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많다. 말기암으로 미각을 완전히 상실한 환자들은 평소에 맛있는 것을 자주 먹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의외로 크다. 자신이 제일이라고 여겼던 생활에 대한 반성, 너무 감정적으로 살았던 태도에 대한 각성,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했거나 나쁜 일에 손댔던 과거에 대한 자성 등도 죽음 앞에서 흔히 겪는 변화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자주 들린다. 인간이 자신의 몸에 '저지른' 행동을 따지면, 죄목(罪目)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임종 환자 중에는 끝까지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놓지 않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다니, 삶의 마감이 그렇게 간단치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는 죽음에 순응(順應)하게 되고, 모두 마지막으로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접하는 것이 일상인 호스피스 의료진들은 "죽음을 보면, 삶이 보인다"고 말한다. 인생의 밑그림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다. 호스피스 사람들은 말한다. 이곳이 삶의 끝이지만, 여기에서는 삶의 시작이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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