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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농민이 아니면 땅을 가지지 말라 - 다산 정약용

앤 셜 리 2011. 8. 7. 17:02

농민이 아니면 땅을 가지지 말라 -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신유사옥으로 강진에서 무려 18년을 보낸다. 하지만 강진에서의 삶은 민중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약용은 주자학, 양명학,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학문, 그리고 김정희 등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청대 고증학까지 다양한 요소가 녹아 있는 자신의 학문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목민심서』는 지방행정 개혁론으로, ‘목민심서’라는 제목에는 백성을 기르는 일에 뜻이 있으면서도 귀양 와 있기 때문에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강진에서의 18년과 다산학

반대파들의 모함을 견디다 못해 정조에게 간청을 해서 벼슬을 내놓고 서울 집에 머물던 39세의 정약용에게 그를 못내 그리워하던 정조가 열 권의 책을 보내왔다. 다섯 권은 집에 두고 보고 다섯 권은 제목을 붙여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뒤 정조는 근대국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국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약용은 자신이 거처하던 방 이름을 ‘여유당’이라고 지었다. 여유당은 『도덕경』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겨울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그리고 이웃을 두려워하듯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아마 정조의 죽음 뒤에 몰아칠 폭풍을 예견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1년 서구문물과 함께 들어 온 천주교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집권세력은 정조의 죽음을 기화로 반대파들의 숙청에 나섰다. 문초를 받는 사람들은 천주교에 긍정적이면서 사도세자를 높이고 정조를 돕던 남인 계열 시파였고, 서슬 푸르게 문초하던 사람들은 위정척사를 내세워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사도세자의 학살을 옹호하던 북인 계열의 벽파였다.
신유사옥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에는 정약용(1762-1836)의 형제 여럿이 들어 있었다. 더구나 둘째 형 약전과 셋째 형 약종이 모두 주요 인물로 지목된 상황이라서 정조가 죽기 한 달 전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정약용도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주고받은 편지들을 증거 삼아 심문하던 형리들이 약종이 괴수인지를 묻자 정약용은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으니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라고 답하였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은 목이 잘리고, 이익의 제자였던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중에서 죽었으며, 정약용은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그 뒤 약전은 흑산도에, 약용은 강진에 머물면서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 다시는 살아서 얼굴을 대하지 못하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무려 18년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이 시련의 세월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큰 산 또한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정약용이 머물던 귤동마을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외가에는 윤선도로부터 전해진 천 여 권의 책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수시로 외가를 드나들며 책을 볼 수 있었다. 정약용은 오랜 시간 꼼짝 않고 책을 보는 바람에 엉덩이가 짓무르자 천장에 줄을 묶어 선반을 달아 맨 채 서서 글을 썼고, 그래서 이번에는 나무에 쓸린 팔꿈치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고 한다. 43세 때에는 큰아들이 유배지로 찾아오자 『주역』과 『예기』 등을 가르친 뒤 돌아가 아비 대신 아우들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이 애틋한 가르침은 52조의 『승암문답』으로 정리되어 전해진다. 또 아내가 책 표지로 쓰라고 헌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을 때에는 그 천을 잘라 두 아들을 위한 가르침을 담은 책의 표지로 쓰고, 남은 천에 매화를 그려 딸에게 보냈다.
하지만 강진에서의 삶은 민중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호남은 곡창이어서 벼슬아치들의 수탈이 심했고, 더구나 강진은 거둬들인 쌀을 서울로 보내는 중심지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라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성기를 잘라 버린 사내의 아내가 울부짖는 것을 보고 지은 ‘애절양哀絶陽’은 생생한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실학의 집대성과 양수리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난 뒤 여생을 보냈던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어머니를 잃은 정약용을 큰 형수가 길렀는데, 큰 형수의 동생이었던 이벽을 통해 일찍부터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14세 무렵 정조가 임금이 된 뒤 호조 좌랑이 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서 이가환, 권철신 같은 성호학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인의 우두머리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같은 북학파 사람들과 사귀었고, 21세 때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조가 유생들에게 『중용』 조목 70군데에 대한 풀이를 과제로 주자, 『중용강의』를 지어 올려 정조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28세 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한 뒤 내내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약용은 그 같은 정조의 신임에 대한 보답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찾던 정조를 위해 한강에 뜬 다리를 만들었으며, 거중기와 바퀴 달린 달구지를 발명하고 기하학과 측량술을 동원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원성을 쌓았다.

정약용에게는 다산과 여유당 외에 ‘열수’라는 호가 있다. 열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또는 두물머리의 다른 이름으로 경세치용 학파와 이용후생 학파를 종합해 낸 다산의 학문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명칭이다. 더구나 그의 학문에는 주자학, 양명학,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학문, 그리고 김정희 등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청대 고증학까지 다양한 요소가 녹아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치인’은 일반 선비들과 달리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극진히 섬기는 것이었다. ‘수기’에 해당하는 저술은 사서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책들이며, ‘치인’에 해당하는 저술은 ‘1표2서’라고 불리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이다. 『경세유표』는 중앙행정에 대한 개혁론이며, 『목민심서』는 지방행정 개혁론이고, 『흠흠신서』는 죄수의 인권에 대한 주장을 담았다. ‘목민심서’라는 제목에는 백성을 기르는 일에 뜻이 있으면서도 귀양 와 있기 때문에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다산학의 특징은, 첫째 경험과 실증이다. 정약용은 의사들이 진맥을 하면서 몸 속의 오장을 짚어 말하는 것은, 한강 물을 가리키면서 저 물은 오대산에서 왔고 저 물은 금강산에서 왔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이치로 보는 태극도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의 이치라고 이해하였다.
둘째는 신비주의 비판이다. 정약용은 점, 풍수지리, 관상 같은 술수를 부정하였다. 부모를 내다 버리던 고려장을 없애려고 좋은 자리에 모시면 복을 받는다고 한 것이 이제는 폐단이 되었다고 하면서 썩은 해골이 어떻게 산 후손의 복을 좌우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하였다. 또한 성인도 신비한 사람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행동이 도리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명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조선이 작은 중국이고 청나라와 일본은 오랑캐라고 멸시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공자가 높였던 주나라도 오랑캐였으며, 선비족의 위나라나 거란이 세운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모두 훌륭한 나라라고까지 하였다.

농민이 아니면 땅을 가지지 말라

정약용은 인간의 본성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슴이 들을 좋아하고 꿩이 산을 좋아하며 벼가 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嗜好)를 바탕으로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생각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실천에서 도덕 근거를 찾으려 한 것이다. 또한 욕망이 없으면 실천 결과인 선악도 없다고 함으로써 욕망을 구체적인 삶의 추동력으로 보았다. 이처럼 정약용은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을 전개한 것이다.
정약용은 38세 때 급진적 토지제도인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30가구를 1려로 하고, 3려가 1리, 5리가 1방, 5방이 1읍이 된다. ‘여’의 땅은 공동소유이고, 마을 사람들이 여장을 뽑으며, 여장은 날마다 할 일을 지시하고 집집마다 나와서 일하는 양을 기록한다. 가을이면 수확을 공터에 모아 놓고 세금과 여장의 봉급을 뺀 나머지를 일한 양에 따라 나누어 갖는다. 물론 이 땅은 모두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땅이다.
하지만 상인, 기술자, 놀고먹는 양반은 땅을 나누어주는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양반도 직접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상업이나 공업 가운데 한 가지를 해야 하며, 육체노동이 어려운 양반은 농작물 연구, 농사법과 농기구 개선 연구, 또는 농민의 자식들을 가르침으로써 먹을 것을 얻을 뿐이다. 정약용의 개혁론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는 초기 공산주의를 보는 것 같다. 정약용은 만년에 고대부터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꼽혀 왔던 정전제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전론이나 정전론이나 그 속에는 민중의 삶을 지키려는 한결같은 염원이 담겨 있다.
근대를 향한 역사의 흐름은 민주와 평등을 향한 움직임이었으며, 비록 세계사적 변화의 중심에 서지 못했던 작은 나라 조선의 지식인이었지만, 생각만큼은 시대적인 요구나 변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약용에 따르면, 고대에는 다섯 집이 모여 ‘인장(隣長)’을 뽑고, 집단 다섯이 모여 ‘이장’을 뽑고, 다섯 마을이 모여 ‘현장’을 뽑고, ‘현장’이 모여 제후를 뽑고, 제후들이 천자를 추대했기 때문에 천자가 잘못하면 제후들이 천자를 바꾸었다. 그러나 진시황부터 권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치는 것을 반역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생산자 중심의 경제체제에 대한 구상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뜻을 모아 가는 민주집중 형식의 정치체제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국학 연구에 앞장섰던 정인보는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대사상의 연구요, 조선 혼의 명암, 또는 전 조선의 흥망쇠멸에 관한 연구”라고 하였다. 심지어 일본 학자들도 “다산은 조선의 영광”이라고 했으며,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 또한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읽고 탄복하여 정약용의 제삿날을 기억해두고 추모했다 한다. 다산이 살아서 절대농지까지 투기 대상으로 삼는 오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다면 무엇이라 할까?

저자 김교빈 자세히보기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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