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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호사 누린 ‘조선 귀족’들

앤 셜 리 2011. 8. 12. 14:53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호사 누린 ‘조선 귀족’들

 

시사저널 | 안성모 | 입력 2010.08.26 






한·일 강제 병합 100년을


맞았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 친미파·친러파·친일파·친청파 등으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이며 외세에 휘둘렸던 조선 왕조는 이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이처럼 강제 병합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데는 당시 대한제국 황제의 측근과 고위 대신 중에 일본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고 부를 차지하려는 친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온갖 특혜를 누리며 호의호식했다. < 시사저널 > 은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발간한 백서를 토대로 강제 병합 과정에서 매국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들의 행적과 조선인 전범들의 통한의 삶, 그리고 와다 하루키 교수의 인터뷰를 싣는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왼쪽)와 순종황제. 한·일 강제 병합 이후 호의호식한 매국노들과 달리 왕실 가족은 비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시사저널자료

■'매국 명문가' 이완용-'친일 패밀리' 이근택

대표적인 매국노로 꼽히는 이완용은 처음부터 일본에 가까운 인물은 아니었다. 1882년 증광별시에 합격한 이후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를 지냈고,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해 외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 초대위원장을 맡았고, 1898년 2월 독립협회 2대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미국과 러시아에 가까운 인물로 독립협회에서 2년여 동안 활동한 이완용이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1904년 11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정계에 복귀하면서부터였다. 그해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계는 완전히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는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와 밀착해 이듬해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이완용은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다.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다. 내각 총리대신으로 올라선 그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양위를 관철시켰고, 대한제국의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 등을 통감부에 넘겨주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도 체결했다.

매국 행위로 지탄을 받았던 이완용은 1910년 8월22일 전권위원으로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조약문에 기명 조인했다. 이로써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 모두에 포함된 그는 우리 민족 역사에서 최대의 치욕인 '매국노'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반면에 일제로부터는 한·일 병합의 일등 공신으로 대접받았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연 수당 1천6백원을 받은 그는 1주일 뒤 백작 작위와 훈1등 서훈을 받았다. 1912년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어 연 수당이 2천원으로 올랐고, 1920년에는 후작으로 특별 승작되었다.

이완용의 권세는 자신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완용가(家)는 형제와 자손을 합쳐 세 명이 일본으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를 받고 세 명이 이를 계승한 '매국 명문가'였다. 차남 이항구는 1910년 10월 이후인 일제 강점기에 작위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손자 이병길은 후작 작위를 물려받아 광복 직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때 이완용의 아들을 비롯한 가족, 친·인척, 문객들까지 인사에 관여해 현직 인사만 65명에 이르러 '가족 정부'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완용은 일제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일제와 황실로부터 직접 받은 돈만 해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의 대가로 10만원, 영친왕을 세자로 책봉한 공로로 40만원,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후작 작위와 함께 받은 은사금 15만원 등 수십만 원에 이른다. 여기에 총리대신으로 재직하면서 뇌물과 횡령 등을 통해 적지 않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파들이 재산을 축적한 또 하나의 방식인 국유 미간지나 임야를 무상으로 대부받아 제3자에게 매각해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재산이 한·일 병합 당시 100만원(현재 시가 2백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특히 재산으로 비옥한 논을 집중적으로 매입해 일제 초기 토지 보유 규모가 여의도 면적의 약 1.9배에 이르렀다. 다만, 토지를 오래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 되팔아 현금과 예금으로 보유했다. 1925년 당시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라는 명칭에 걸맞게 최소한 3백만원(현재 시가 6백억원) 이상을 소유했다.

조선 귀족 중에는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도 있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은 일제 강점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형 이근호와 동생 이근상은 남작이 되었다. 충북 충주 출신인 이근택은 피난 온 명성황후의 눈에 띄어 출셋길에 들어섰다. 일본인 점포에서 명성황후의 혈흔이 남아 있는 수대 한 벌을 발견하고는 6만냥에 구입해 임금에게 바쳤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근택은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5년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친일 행각에 앞장섰다. 일제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맡은 그는, 은사금 5만원과 매년 1천6백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5년 시 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17년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근택은 1906년 육군부장으로 일본 관병식에 참석하는 의친왕을 수행해 일본을 다녀왔다. 이듬해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1908년 일제가 전국의 산림을 측량하기 위해 설치한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지냈고, 다음 해에 회장에 선출되었다. 은사금 2만5천원을 수령했다.

이근상은 1905년 남산 왜장대에서 러일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축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1906년 2월 제실제도국 총재를 지낸 그는 같은 해 7월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 친일 관료들과 일본인 관료들로 구성된 사교 단체인 대동구락부 위원도 지냈다. 역시 남작 작위를 받은 후 은사금 2만5천원을 받았다.

을사늑약 이후 승승장구한 이근택 형제들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집이 나란히 모여 있었는데, '오만석군'으로 불릴 정도로 부귀를 이루었다. 특히 이근택은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건넨 뇌물로 거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군부대신 이근택은 경리원 수조관을 각 도에 파견하여 받아들이는 뇌물이 백만(100만원)을 헤아렸다'라고 한다.






■ '토지 대왕' 민영휘-'황실 외척' 윤택영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영휘는 일제 시기 조선 제일의 갑부로 불렸다. '토지 대왕'이라는 호칭도 뒤따랐다. 1877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진압에 참여하면서 세도를 누리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농민군 토벌을 기도하기도 했다.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한동안 권력의 핵심부에서 밀려났지만 원로 대신의 지위는 유지했다.

민영휘는 이 시기에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 일제가 고종의 퇴위를 강요할 때 양위의 불가피성을 상주하는가 하면, 그해 10월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관리들이 조직한 단체인 '신사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9년 7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황태자 도한 기념장'을 받았다.

그해 9월 신궁경봉경회 고문으로 참여해 일본 신궁 건립에 앞장선 민영휘는 12월 이완용 등이 한·일 병합을 추진하고자 조직한 국민연설회의 장서총대위원, 1910년 1월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를 지지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조직된 국민동지찬성회 고문, 3월 한·일 병합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조직된 정우회의 총재 등을 맡아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조했다.

민영휘는 한·일 병합에 기여한 공으로 1910년 10월 자작 작위를 받고 은사금 5만원을 수령했다. 1912년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은 그는, 같은 해 12월 종4위에 서위된 이후 승급을 거듭해 1935년 12월 사망 당시 정3위에 추서되었다. 같은 민씨 일가로 권력의 경쟁자였던 민영환이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자결한 것과 달리 그는 친일의 대가로 평생 귀족의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민영휘는 '조선에서 고금 몇백 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로 한때 재산 규모가 4천만원(현 시가 8천억원)에 이르렀다. 사망 당시 재산 규모는 토지 1천만원을 비롯해 주식 100만원, 별장 주택 100만원 등 약 1천2백만원(현 시가 4천2백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처럼 그의 재산 대부분이 토지였는데 팔도강산 해 뜨고 흙 있는 데 치고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재산의 등기상 소유권은 본인 명의가 아니었다.

윤택영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인이다. 1899년 시강원 시종관에 임명된 그는 1906년 12월 셋째딸이 황태자비가 되자 이듬해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1908년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후원해 조직된 대동학회 회원을 지냈으며,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도 역임했다.

윤택영은 일제 강점 직후 한·일 병합에 기여한 공으로 후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 50만4천원을 받았다. 1911년 조선귀족회 이사를 맡은 그는 1913년 조선 귀족들의 임야 및 삼림 취득을 위해 조직된 귀족보식원조합의 간사를 지냈다. 1920년 4월 도쿄에서 치러진 왕세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윤택영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활발한 로비 활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경성 시내 고급 주택 한 채 가격의 50배에 달하는 50여 만원의 거금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여기에 계속된 사치 생활로 인해 빚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순종과 일제 통감부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빚을 갚아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대가였는지 일제로부터 최고액의 은사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많은 빚과 채권자들의 끊임없는 소송에 시달린 윤택영은 결국 중국으로 도피 생활을 떠나는 처지에 놓였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 잠시 입국했다가 다시 경성을 탈출한 그는 1935년 베이징의 허름한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윤택영의 형인 윤덕영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추도하는 관민추도회의 발기인이 되어 추도 제문을 낭독한 인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경술국적' 중 한 명이다. 동생이 타향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는 인왕산 아래에 대저택을 건축했다. 송석원이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아방궁으로 더 많이 불릴 정도로 호화로웠다고 한다. 일제 후반기 그의 납세액 순위가 20위 안에 들 정도로 서울의 부호였다.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에 귀속한 최고액은 시가 약 3백22억원에 이르는 이해승의 재산이다. 그는 철종의 생부로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전계대원군의 후손이다. 190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예릉 참봉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라 17세이던 1907년 시종원 시종관이 되었다. 일제 강점 직전 종2품 가선대부 청풍군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일제는 한·일 병합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주권 양도의 주체인 황실의 협조를 중요시했다. 이해승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함께 16만8천원이라는 거액을 은사금으로 받았다. 물론 이러한 특혜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해승은 1910년 11월 조선 귀족을 대표해 도쿄로 건너가 일왕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한 달 뒤에는 데라우치 총독 관저를 방문해 역시 감사 인사를 했다. 이후에도 일본 왕실 및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각종 제례 및 행사에 참여했는데, 1914년 4월에는 일본 황태후가 사망하자 도쿄로 건너가 참배를 하기도 했다.

치욕을 모르는 '나쁜 재산' 찾기

나라를 판 대가로 위세를 떨쳤던 '조선 귀족'의 후손들은 일제 패망 이후 권세를 내놓아야 했다. 가문의 '영광'은 '굴욕'으로 바뀌었다. 남겨진 재산은 제각각이었다. 이완용의 경우 토지 대부분이 1919년 이전에 일본인 지주에게 넘겨졌고, 이 토지는 1948년 한국인 소작농에게 분배되었다. 하지만 일부 후손들이 1990년대 중반 '땅 되찾기'에 열을 올려 비난을 받았다.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은 1992년 소송을 통해 서울 서대문구 일대 토지(당시 시가 30억원)를 되찾아 팔고 난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근택 형제의 재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아들 이창훈은 음주가무로 재산을 탕진했고, 사촌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덕영의 후손들은 상당수가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 요구와 지탄 속에서 해외로 이주했다. 농지 개혁으로 상당수의 토지가 분배 대상이 되었고, 후손들도 노골적으로 재산을 지켜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친일재산조사위는 민영휘가 일제 시기 취득해 후손에게 상속한 재산과 관련해 토지·임야 총 51필지(공시지가 51억8천여 만원) 등에 대해 국가 귀속을 결정했다. 이해승의 상속 재산인 토지·임야 총 1백98필지(공시지가 1백56억9천여 만원) 등에 대해서도 국가에 귀속하기로 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후손들은 해당 재산이 '한·일 병합의 공'으로 수작한 친일 재산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행정 소송을 제기하는 등 반발해왔다.

'국치 100년'의 의미 새기는 걸음들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 전시는 9월30일까지 열린다. ⓒ시사저널 박은숙

강제 병합 100년을 맞아 의미 있는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한·일 과거사 청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 시민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강제 병합 100년 공동 행동 한·일실행위원회'는 8월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대회를 개막했다. 행사는 국치일인 오는 29일 서울에서 폐막식을 가질 예정이며, 27·28일 이틀간 성균관대 6백주년 기념관에서 국제 학술대회도 갖는다.

한·일실행위원회는 부대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일제 강점기 유물 및 개인 소장품 4백여 점과 사진·음향·영상 자료 등을 한데 모은 강제 병합 100년 특별 전시회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를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열고 있다. 25일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를 갖고, 마지막 날인 29일에는 한·일 시민 교류의 밤을 통해 지속적인 연대 활동을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지역 행사도 활발하다. 부산에서는 한국·일본 대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평화제전 행사가 열리고 있다. 평화제전추진위원회는 광복절인 15일을 평화의 날로 선포한 데 이어 일본 평화통신사의 일제 강점 역사 유적지 전국 순례를 진행하고 있다. 28일 평화영화제와 함께 29일에는 삼보일배 평화대행진, 한·일 1천인 평화선언, 평화콘서트, 청소년 역사 탐방 등의 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전북 전주에서도 '국치 100년 전북 시민대회'가 열리고 있다.

안성모 / asm@sisapress.com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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