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하는 큰딸(40)과 연구원 하는 작은딸(37)이 2006년 11월과 이듬해 1월, 50일 간격으로 외손자를 하나씩 낳았습니다. 가슴이 떨리더군요. 복숭아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어봤어요. "너희는 어디서 왔니?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두 딸 모두 시댁에서 아이를 키워주실 형편이 못 됐어요. 아내(63)는 용감했어요. "우리가 키워줄게."
아내는 세탁기도 없고 온수도 안 나오는 집에서 연탄불을 갈며 4남매를 혼자 키워낸 '육아의 달인(達人)'이에요. 그런 아내가 "내가 키우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키우자"고 한 데 주목해주세요. 쌍둥이를 두신 분들은 압니다. 저는 보조 인력이 아니라 필수 요원이었습니다.
그렇게 환갑 넘어 육아에 도전한 기록이 지난 7월 펴낸 책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외할아버지의 손자 키우기'(황소자리)입니다. 은퇴한 할아버지가 등 떠밀려 손자 보다가 쓴 책이라곤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좀 다른 맥락에서 제 인생을 바라봅니다. IMF 외환 위기 때 은행 지점장으로 명퇴한 다음 저는 저 자신을 '글 쓰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경남 진주에서 50리 떨어진 산골이 제 고향입니다. 일곱 살 때 6·25전쟁이 터져 1950년 여름 한철에 아버지와 삼촌이 돌아가셨어요.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털썩 주저앉은 할머니도 그해 가을을 못 넘기고 별세하셨죠. 한학(漢學) 하신 할아버지와 서른 살 청상과부 어머니, 그리고 올망졸망한 아들 셋이 남았어요.
저는 초등학교 마치고 서당 다니며 농사를 거들었지요. 어린 나이지만 이대로 산에 묻혀 살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동네에서 30리 떨어진 중학교에 무작정 찾아갔어요. "월사금 못 냅니더. 받아만 주이소. 1등 하겠심니더." 받아주시더군요. 이후 전액 장학금 주는 고등학교를 찾아 지리산 너머 광주에 있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진주를 떠나던 날 어머니가 쌀 자루 하나 메고 떠나는 저를 하염없이 바라보신 기억이 나요. 은비늘 반짝이는 섬진강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가슴이 에었지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중앙대를 졸업한 뒤 한일은행에 들어가 근속 30년을 바라볼 때 외환 위기가 덮쳤지요. 혼을 바쳐 일한 직장이지만 저는 뜻밖에 담담했어요. 일개인에게 닥친 사고가 아니라 한 세대 전체를 쓸어가는 '쓰나미'였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저는 명퇴에 앞서 40대 초반에 인생 공부를 미리 해뒀는지 몰라요. 알 수 없는 이유로 1년쯤 시름시름 앓았어요. 앞만 보고 달린 끝에 활시위가 끊어진 거죠. 병원에 가도 안 낫던 병이 성경·불경·노자·장자를 읽으며 자연스레 사라졌어요. 제가 좀 느슨해지니 인생을 길게 보게 된 거죠. 하지만 저처럼 담담하지 못한 분도 많았어요. 저는 같은 은행 명퇴자들과 함께 매달 한 차례 옛절(古寺)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10년간 그렇게 마음공부를 한 기록을 모아 2년 전 '10년간의 하루 출가'(황소자리)를 펴냈지요.
인간은 서너 살 이후만 기억하지요. 제 또래 많은 남자처럼 저도 직장 일에 쫓겨 4남매 크는 걸 살뜰하게 챙기진 못했어요. 제 딴엔 사랑을 쏟았지만 나중에 보니 아이들은 기억도 못 하고 불만이 많더라고요. 딸들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 차원에서 육아 필수 요원에 기꺼이 자원했고, 외손자들을 키우는 동안 천천히 아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어요. 동시에 저는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는 지금 이 아이들처럼 너희도 끔찍이 사랑했단다."
외손자들은 이제 웬만큼 커서 부모 품에 돌아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어요. 그 애들이 기억할까요? 외할아버지·할머니가 기저귀 갈고 어부바 하며 자기네를 기른 사실을, 한때 우리가 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저는 제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두 녀석과 함께 보냈어요. 녀석들이 절대 기억하지 못할 한두 살을 우리는 진하게 같이 보냈지요.
외손자들은 벌써 많이 잊었더군요. "할아버지가 내 기저귀 갈아줬으니까 나도 커서 할아버지 기저귀 갈아줄게"라는 약속만큼은 잊지 않길 바라요. 바라건대 외손자들이 나중에 제 책을 읽고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해요. 허망하지 않으냐고요? 저는 이미 다음 책을 쓰느라 바쁘답니다. '살아보니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은 없고 부모 자식, 직장 동료, 기타 모든 관계의 핵심이 상생(相生)이더라' 하는 내용이에요. 이 자리를 빌려 제 아들 내외와 같은 지역에 사는 바람에 제 친손자를 키우고 계신 사돈 어르신들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얼마나 고충이 많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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