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이 갈기를 세우듯 바다가 잔뜩 몸을 부풀리며 온다. "우~" 하는 외침과 함께. 이윽고 정점에 오른 바다가 이빨을 한껏 벌려 뭔가 삼키려는 듯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 등성이에서 포말이 해무(海霧)처럼 피어오른다. "와르릉 쾅쾅!!" 곤두박질치며 투명한 옥빛 파도와 수정 구슬 같은 물방울로 산산이 으깨진다. 겨울 바다는 그렇게 끝없이 새로 일어나 달려오고 부서진다. 으르렁대는 바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바다는 동해(東海), 그것도 겨울 동해다. 코끝이 찡하도록 춥고 하늘이 맑게 열린 겨울날, 동해는 베일 듯 시퍼렇다. 세찬 바람까지 불어주면 뒤집히듯 들끓고 포효한다. 거기에다 하얀 눈이 백사장을 뒤덮어 '백설장(白雪場)'으로 바꿔놓으면 세상은 청색과 백색, 두 빛깔뿐이다.
지난 주말이 딱 그랬다. 금요일까지 영동에 쏟아지던 폭설(暴雪)이 그치고 이튿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예보됐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나섰다. 고속도로를 타고 묵호까지 내달린 뒤 동해 어달·망상해변을 거쳐 강릉 헌화로·정동진·등명해변·안인진까지 북상(北上)하는 한나절 해안 드라이브 코스를 잡았다. 동해안은 북으로 길을 잡아야 바다를 더 가까이 두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고속도로 하행선의 동해휴게소부터 들렀다. 휴게소 언덕에 서니 장쾌한 망상 바다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잘 나왔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다. 얼마나 눈이 많이 왔는지 전망대로 내려서는 가파른 계단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얀 눈밭과 대비돼 바다는 더욱 짙은 잉크빛이다.
묵호항은 호객 소리, 흥정 소리로 요란하다. 어시장(魚市場)에서 펄펄 뛰는 삶의 박동 소리를 듣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는다. 흥정 끝에 횡재하듯 고등어를 1만원에 열다섯 마리씩 사 들고 나섰다. 동해안 나들이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묵호항에서부터는 줄곧 바다를 따라간다. 파도가 부서지면서 찻길로 뿌연 물보라를 내뿜는다. 그 바다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가다 서다를 거듭한다.
묵호항 북쪽 어달해변은 길가에 길이 300m, 폭 30m로 붙어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이다. 여름이면 물이 얕고 잔잔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편하고 오붓하게 즐기는 곳이다. 그러나 겨울 어달은 순하지 않다. 요동치는 바닷가에 물새들이 어찌할 줄 모른 채 시린 바닷물에 발을 적시고 서 있다.
길이 5㎞, 폭이 넓은 곳은 500m에 이르는 망상해변은 온통 눈에 덮여 있다. 드넓은 눈밭에 여행자는 두 팀뿐이다. 겨울 망상 바다는 스산하고 처연하다. 사람을 사색과 상념에 빠뜨린다. 살아온 날들을 회한(悔恨)처럼 되새기게 만든다. 사람으로 미어지는 여름 바닷가, 델 듯 뜨거운 모래밭 위에선 길어올릴 수 없는 감정들이다.
그러나 겨울 바다는 아름답다. 쓸쓸한 아름다움이기에 더 진하다. 얼굴은 바람에 차고, 눈은 짙푸른 바다에 시리고, 코는 짭조름한 갯냄새에 깨어나고, 귀는 파도의 노래로 충만하다. 바다를 오감(五感)으로 마주하는 사이 어느덧 부정은 긍정으로, 후회는 희망으로 바뀐다. 겨울 동해는 참회와 정죄(淨罪)의 바다다.
헌화로(獻花路)는 강릉 남쪽 포구 금진항에서 북으로 심곡항까지,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 아래 바닷가를 휘감고 간다. 아마도 이 땅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붙어 가는 찻길일 것이다. 2.3㎞밖에 안 되는 짤막한 해안 도로지만 겨울엔 누구도 휑하니 지나칠 수가 없다. 한 굽이 돌 때마다 바다가 광포하도록 매혹적인 풍경으로 발길을 붙잡는다.
헌화로 바닷가 난간은 염분에 강한 유리섬유로 만들었다. 파도가 여차하면 헌화로로 넘쳐들기 때문이다. 갯바위를 때리면서 몇 길 높이로 치솟은 물보라가 사정없이 도로를 덮친다. 몇 십m마다 차를 세우고 내리다 보면 얼굴도 옷도 온통 소금기를 뒤집어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곳이 헌화로다. 유쾌한 사람을 보면 저절로 유쾌해지듯 힘찬 바다를 보면 저절로 몸 안에 기운이 쌓인다. 겨울 동해는 엑스터시, 광희(狂喜)의 바다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정호승의 시 (詩) '바닷가에 대하여'처럼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나만의 바다를 동해에 하나쯤 둘 만하다.
겨울 동해의 파도 소리는 거절할 수 없는 부름이다. 겨울 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더욱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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