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월 하순 하와이. 박태준은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쓸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갔지만 믿었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프레드 포이 대표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계 철강업계와 금융기관들은 이름조차 낯선 후진국 대한민국에서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포이는 박태준이 측은했던지 하와이에 있는 자신의 콘도에서 며칠 쉬었다가 귀국하라고 했다. '제철에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건설비) 1억달러가 없어서 나가떨어지다니…. 일본에 가서 차관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해변을 걷던 박태준 머리에 불현듯 '대일 청구권 자금'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박태준은 쏜살같이 콘도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서 협상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기간 끼친 각종 피해에 대한 배상 청구로 받기로 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 중 농수산 지원 용도로 사용하기로 한 자금을 제철소 건설로 돌려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기막힌 아이디어군. 대일 청구권 자금이 1억달러는 남아 있을 거야. 일본 정부는 임자가 설득해"라고 말했다.
박태준 자서전에 나오는 결단의 순간이다. 우리나라 경제 개발 초창기를 돌아보면 바로 그때가 우리나라의 운명을 가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국내 정치권은 농수산 지원 용도로 쓰일 자금을 전용하는 데 반대했다. 국회의원의 80%가 농촌 출신이어서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은 국가의 50년 대계를 위한 결정을 했다. 만약 그때 제철소 대신 농수산업을 선택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물론 농업에 투자와 지원도 필요했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인 경제·산업 효과를 보면 '산업의 쌀'로 불리는 제철산업 육성이 더 중요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포스코는 현재 연간 철강 생산량이 3700만t, 연매출 39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톱 4위권의 철강업체가 됐다. 생산능력이나 제품 경쟁력에서는 약 40년 전 포항제철소 건립을 지원해줬던 일본의 신(新)일본제철을 오히려 능가한다. 이뿐만 아니다. 포스코에 이어 현대제철이나 동국제강 등 대규모 철강업체들이 잇따라 건립되면서 한국의 철강은 올해 수출액이 300억달러가 넘는 한국의 6대 수출품에 올랐고 고용인원도 8만명을 넘었다. 또 자동차와 IT·조선·플랜트 등 현재 한국 기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 철강 소재의 자립(自立)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4일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스티브 잡스 애플 CEO가 세계 IT업계에 남긴 영향보다도 박 회장이 한국 산업과 경제에 미친 영향이 몇 배는 클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약 우리가 다시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면 정치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 우리는 어디에 국가적인 투자를 해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사람은 복지를, 어떤 사람은 지역 개발을, 어떤 사람은 교육 투자를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42년 전 포항제철을 선택한 두 거인(巨人)의 결단을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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