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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후계자와 제사

앤 셜 리 2012. 11. 17. 22:51

어부사시사'로 이름난 윤선도가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귀양을 간 것은 왕실의 제사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喪服)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지가 논란이 됐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형 소현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서인(西人)들은 "효종이 비록 왕이었지만 맏아들이 아니므로 어머니는 상복을 1년만 입으면 된다"고 했다.

▶반면 윤선도와 허목을 비롯한 남인(南人)들은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이나 마찬가지니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사람 눈엔 조선시대 사람들이 왜 '상복을 언제까지 입어야 하나' 같은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죽기 살기 싸움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교 국가 조선에서 누가 장례·제사를 주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계와 권력의 향방이 달린 중대 정치사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유배 가 살고 있었다. 효종을 차남으로 보면 효종 사후 왕실의 적통(嫡統)은 장남이었던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이어져야 한다. 반면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한다면 효종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도 자연스럽다. 논쟁은 일단 서인 쪽의 승리였다. 그즈음 제주도의 소현세자 아들이 죽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15년 뒤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해 또다시 '자후대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가' 문제가 불거지자 남인 손을 들어주고 서인을 내쳤다.

▶오는 19일 호암 이병철 회장 25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삼성가(家)가 시끄럽다. 호암 맏손자 이재현씨의 CJ그룹 측은 "호암재단이 올해 추모식에서 가족 행사를 없애고, 해마다 선영 참배 때 다니던 정문을 막고 멀리 돌아가라 한다"고 반발했다. "선영 내 한옥도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고 했다. 삼성 측은 "선영에 정문은 없으며 선영에서 가장 가까운 진입로를 안내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암의 후계자로서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는 3남 이건희 회장이다. 일각에선 이번 일을 삼성가 적통을 둘러싼 양측 갈등이 호암 25주기 추모 절차·방식 문제로 불거진 것으로 보고 있다. 재벌가 중엔 후계·재산 문제로 인한 형제 다툼으로 제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아예 제사를 따로 지내는 곳도 있다고 한다. 몇 백 년 전 조선시대도 아니고, 더구나 한국의 대표 부자들이 제사나 추모식을 볼모로 가족 간에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