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 다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해질 무렵 짧은 휴대전화 문자음이 울린다. 둘째 아들이다.
'죄송합니다. 떨어졌어요.'
꼭 가고 싶어 하던 기업의 최종 면접을 마치고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내 눈가가 촉촉해진다. 이번에는 꼭 될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몸도 예전 같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버거워졌다. 세월의 힘이 너무 강하다. 불현듯 지난여름 절친한 동료가 명예퇴직하면서 살짝 던진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는데 이렇게 퇴직하는 것이 내게는 정답인 것 같아. 너도 너무 무리하거나 주변 눈치 보지 말고 적절한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것도 괜찮을 거야."
사실 지난해부터 조금씩 나빠진 건강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자신이 있다. 생각지도 않은 노안(老眼)이 왔기에 글을 가르치는 처지에서 좀 불편하지만 노련한 경력으로 헤쳐나간다. 이따금 지금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자식들이 눈에 밟힌다. 곰곰 생각해보면 금전상으로는 지금 나가나 안 나가나 크게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가로막아 계속 미룰 수밖에 없는 문제다. 조금씩 허물어지는 정신과 무거운 몸에 활력을 찾고자 저녁 시간은 운동과 취미생활에 전념했다. 그 열정이 지나쳐 보였을까? 걱정하는 가족이 만류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말하며 운동에 더 박차를 가했다. "나는 쓰러지더라도 운동하다가 쓰러지겠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달아 숲은 물감을 엎어 놓은 듯 곱고 화려하다. 바람과 낙엽이 어수선하게 춤을 추는 휴일 오후였다. 오전 내내 TV로 소일하던 둘째 아들과 함께 운동을 나갔다.
"아버지,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취업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까지 정답을 가지고 살아온 적이 있었는지? 젊은 시절 내가 교단에 설 때 다른 친구들은 돈이 되는 직장을 찾아 떠났다. 사범대학을 나온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고, 친구들은 힘든 일이지만 노력한 성과만큼의 보상을 받는 곳에서 자기 삶을 이끌어 갔다. 그들이 나보다 몇 배나 많은 소득으로 여유 있게 생활할 때도 나는 그 친구들의 길이 정답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내가 가는 교직 또한 모든 이에게 맞는 답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되었지만….
옆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짠한 생각이 든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면 잠깐 쉬는 것도 좋지. 인생은 긴 마라톤이야.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한참 걸으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일주일 전이었다. 늦은 저녁 연속극에 빠진 아내에게 한참 눈치를 보다가 "명예퇴직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넌지시 운을 떼 보았다. 아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뭐,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라고 말하고 상대도 하지 않는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해도 정신은 더욱 또렷하다. 옆자리의 아내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한다. "… 당신 정말 그렇게 견디기 어려우면 그만두세요. 아이들 취업이나 결혼 문제 등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다 운명대로 살아야지요." 쉽게 말하는 듯하지만 무척 고심한 뒤일 것이다. 대신 운동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자기가 짜주는 대로 하란다. 가만히 아내의 손을 잡았다. 꺼칠꺼칠한 손끝으로 함께 절약하고 고생한 고마운 마음이 전해왔다.
며칠이 지났다. 거실 소파에서 같이 TV를 보던 아들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물이 흘러가는 대로 살겠습니다. 지금은 잠시 쉬더라도 다시 마음잡고 꾸준히 하면 뭐든 되지 않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추운데 건강 챙기세요." 문제에 대한 답을 아들은 스스로 터득한 모양이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던 아이였다. 그날 밤 산책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아들이 아직 정확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가족과 함께라면 순리대로 잘 흘러가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것이 내가 찾은 나만의 정답이었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요즘은 전과 달리 잠을 푹 잔다. 삶에서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은 정확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답이 없는 것이 아닐까? 똑바로 보지 말고 15도만 살짝 비틀어서 생각해보면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은 모든 답이 정답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그럴수록 아날로그 시대의 느긋함과 따뜻한 정(情)이 그립다. 우리는 복잡하게 생각하다 단순한 부분을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고민하고 고뇌에 빠지기보다 내가 선택한 답을 정답이라 믿고 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닐까?
신형호 대구 계성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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