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에 잘 나가지 않는다. 1년에 두 번쯤 나갈까? 이유는 내 음악을 신중하게 소개할 프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문화 프로그램 PD가 "선생님, 40분 동안 선생님 음악 세계를 단독으로 다루겠습니다. 제발 응해주세요." 그래서 "그런 좋은 작품이라면 만들어 봅시다"하며 출연했다. 아, 그런데 프로그램 방영시각이 평일 밤 1시였다. 참 잘 만든 프로였지만 도대체 누가 그 시간에 그것을 봤겠는가?
내가 사는 고시원 같은 집에는 TV가 두 개다. 하나는 딸 양호가 만화영화를 보고 또 하나는 마누라 옥사나가 외국 영화를 본다. 나는 틈틈이 두 딸(옥사나는 22세 연하다)이 외출하거나 낮잠 잘 때 내가 원하는 채널을 돌린다. "어, 오늘 두 사람 병원 가는 날이네, Boob Tube(바보상자)나 좀 보자.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하며 채널을 돌린다. 음식프로가 나온다. 다른 채널을 돌리니 또다시 음식 프로. 할 수 없이 케이블 TV로 돌리니 또 음식프로.
혼자 연구해 보니 먹는 것처럼 즐거운 게 없다. 첫째, 경제 공황을 겪고 있는 지금, 먹는 것에 집중하면 힘든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오늘은 뭘 먹을까? 갈비탕? 족발? 김치찌개? 아니면 파스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즐거워진다. 맛있게 먹는 것을 생각하니 부장님의 짜증나는 행동, 시집 안 간다는 엄마의 잔소리도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렇게 많은 음식과 요리 프로는 지금 시청률 1위다. 그것도 죄다 프라임 타임에 배치돼 있다. 정부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경제는 꽁꽁 얼어 서민들 삶이 어려운데다 한반도 냉전의 불안감은 끝을 모른다. 그러나 음식프로가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서민들에게 주는가? "데모하지 말고 요리하시오"가 정부 구호가 될 것이다.
둘째, 음식프로는 제작비가 싸다. 시나리오가 복잡하지도 않고 스타 셰프나 음식 전문가 한두 명만 있으면 끝이다. 요리하고 맛을 평가하고 군침 돌게 촬영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만을 음식으로 잊는다. 미국 흑인 하류층 비만의 큰 이유는 지나치게 먹기 때문이다. 가난의 불만을 먹어 없앤다. 미국 정부는 저소득층에 '푸드 스탬프'라는 공짜 음식 쿠폰을 매달 준다. 현재 약 4600만명이 매달 평균 125달러(약 15만원)를 받는다.
그래도 음식프로는 너무 많은 것 같다. PD님들, 음식프로 줄이고 문화·예술 프로도 몇 개 끼워넣어 주세요. 그러자 우리 두 딸이 병원에서 돌아왔다. 옥사나가 미국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린다. 그런데 그것 또한 음식프로다. 이번엔 나도 1980년대 자주 갔던 뉴욕의 프랑스 식당 레 알르(Les Halles)의 헤드 셰프 출신 앙토니 부르냉이 진행하는 프로다. 일본 채널을 틀어보니 오 마이 갓! '고독한 미식가'인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가 출연하는 맛집 프로다. "오! 너무 맛있어서 혀가 춤을 춘다"는 식이다. 완전 히트다. 너무 고독해서 나도 보게 된다. "아이고, 모르겠다. 양호야! 우리 돼지껍데기 먹으러 가자." 우리는 밤이 무르익는 신촌 골목길로 나선다.
"Food is holy. It's not about nutrients and calories. It's about sharing. It's about honesty. It's about identity(먹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영양 섭취뿐 아니라, 나누고 정직하고 민족성을 찾는 일이다)". ―네덜란드 과학자 루이즈 프레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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