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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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여름으로 달려가던 봄의 발을 붙잡네

앤 셜 리 2016. 5. 9. 17:29

지난 한 달 주말·휴일마다 황사며 미세 먼지가 심술을 부렸다. 찬란해야 할 봄이 빛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 숲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졌다. 수채화가 유화(油畵) 돼 간다. 남녘에 꽃 상륙한 지 한 달 보름도 안 돼 벌써 늦봄 냄새가 난다.

4월 마지막 날도 낮 기온이 24도까지 올라갔다. 이대로 봄을 보낼 순 없다. 충북 괴산 '산막이 옛길'을 걸었다. 괴산호 서쪽 벼랑에 낸 4㎞ 길이다. 아침 아홉 시인데 주차장이 거의 찼다. 휴대전화 날씨 '앱'부터 봤다. 미세 먼지 농도 92㎍/㎥, '나쁨'이다. '보통' 중간값 50㎍/㎥의 곱절 가깝다. 100은 안 넘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고는 이내 미세 먼지를 잊어버렸다.

길 초입 오른쪽 국사봉 자락이 짙고 옅은 녹색의 향연을 벌인다. 아래쪽은 진녹색, 중간은 초록, 위쪽은 아직 연두다. 봄이 꼭대기로 쫓겨 가며 농담(濃淡)의 붓질을 해댄다. 드문드문 섞인 솔숲이 암록(暗綠)일 만큼 신록(新綠)이 눈부시다.

괴산호를 왼쪽에 두고 벼랑길로 접어든다. 험한 절벽 허리에 나무 데크 길을 놓았다. 좁지만 가파르지 않고 숲 우거졌다. 나무 그늘을 오르락내리락 편안하게 간다. 길가엔 이것저것 꾸며놓았다. 호랑이가 살았다는 굴, 노루가 목 축인다는 샘…. 엉덩이 내민 듯 구부러진 나무엔 '미녀 엉덩이 참나무'라고 실없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한 번씩 만지고 지나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심심할까 봐 이야깃거리를 만든 건지는 몰라도 무료할 새가 없다. 발아래 괴산호가 내내 시선을 붙든다. 건너편 물가 나무들이 물빛까지 청록으로 물들였다. 나들이객 태운 유람선이 유유히 오간다. 시원한 호수 바람이 불어와 모자 끈을 바투 묶었다. 미세 먼지도 바람이 다 씻어 갔을 것이다.

돌아오면서는 유람선을 탔다. S자 물길을 가며 산막이길을 쳐다본다. 절벽을 메운 숲 절반쯤이 흰 꽃으로 일렁인다. 때 이른 밤꽃 같다. 유심히 보니 꽃이 아니다. 바람에 뒤집힌 굴참·떡갈·사시나무 잎이다. 회백색 잎 뒷면이 드러나 하얗게 빛난다. 숲 사이로 벼랑길이 부드럽게 휘어간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행렬이 원색 금을 긋는다. 어떻게 저런 곳에 길 낼 생각을 했을까.

칠성면 사은리는 사방 산이 막아섰다 해서 산막이마을이다. 달천 따라가는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천변길은 1957년 괴산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겼다. 마을 사람들은 절벽에 한 명 겨우 다닐 길을 냈다. 위태로워도 생명줄 같은 길이었다.

임각수 괴산 군수는 제주도 올레길이 부러웠다. 그러다 어릴 적 어머니 손잡고 갔던 산막이길을 떠올렸다. 2011년 길 닦아 데크 놓고 괴산호에 유람선 띄웠다. 지난 반년 생면부지 임 군수에게 시달렸다. 잊을 만하면 전화 걸고 편지 보내와 산막이길에 와보라고 채근했다. 견디다 못해 가긴 했어도 떠나는 봄 붙잡았으니 발품 값 하고도 한참 남았다.

산막이길은 금세 입소문이 나 한 해 150만명이 찾아든다. 일흔을 바라보는 군수의 '극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길이 왁자하게 붐빈다. 호젓하게 걷고 싶으면 평일에 가는 게 낫겠다.

서울로 돌아가다 진천 농다리에 들렀다. 천 년 돌다리 건너 걸었던 초평 호반길을 달포 만에 다시 찾았다. 그때만 해도 황량한 늦겨울 숲이어서 여린 새잎 날 때 다시 와야겠다 맘먹었다. 그새 아기 손 같은 연두는 가시고 초록이 지천이다.

충북에서 제일 큰 저수지 초평호는 낚시 명소다. 4년 전 서쪽 호변에 1㎞ 남짓 데크길을 놓았다. 초평호와 농다리 앞글자를 따 '초롱길'이다. 호수와 눈높이를 맞추며 가는 길이 더없이 느긋하다. 떼 지어 오는 산막이길과 달리 삼삼오오 단란한 가족이 많다. 앞서가는 아빠가 아이를 목말 태웠다. 엄마는 곁에서 아이와 동요를 합창하며 간다.

할아버지 손잡고 걷던 두어 살 아기가 "아유 힘들어" 엄살한다. 다람쥐가 길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 챙기려다 사람들 틈에 끼였다. 도망은 쳐야겠고 과자는 아깝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유치원쯤 다닐 여자아이가 허리 굽혀 들여다보며 반가워한다. "청설모만 보다 다람쥐를 여기서 만나네."

초롱길엔 바람이 더 드세게 불었다. 데크길 끝 잘록한 호수를 지르는 구름다리가 휘청인다. 다리 건너 매점에서 커피 한 잔 사 들고 호숫가에 앉았다. 바람이 수면을 쓸고 가며 온통 물무늬를 그린다. 맞은편 숲도 잎을 뒤집어 하얀 꽃으로 바꿔놓았다. 미세 먼지 농도가 40㎍으로 뚝 떨어졌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서울 들어서는 경부고속도로, '그놈의' 달래내고개가 꽉 막힌다. 구름 사이로 내민 해가 맥없이 흐릿하다. 다시 휴대전화를 본다. '양재동 미세 먼지 150, 매우 나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