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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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할매할배의 날'입니다

앤 셜 리 2016. 5. 21. 13:31

아파트 승강기에서 눈인사를 나누다가 정든 이웃이 있다. 그 집에 찾아가거나 우리 집으로 모셔서 차 한 잔 나눈 적 없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그 이웃이 참기름을 한 병 가져왔다.

"어제 고향에 계신 시어머님을 뵈러 갔더니 해깨를 손수 털어 말려 짰으니 사 먹는 것보다 고소할 거라며 몇 병 주셨어요"라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밀었다. 좀 당황스럽고 고맙기도 해서 "이 귀한 걸 주시다니…" 하며 얼떨결에 받았다. 소주병에 담긴 맑은 갈색 참기름에서 참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 이웃은 이후로도 매달 한 번쯤 찾아왔다. 청국장 한 봉지, 다음 달엔 고구마, 농약 치지 않았다는 풋고추, 깻잎, 무, 쌈배추, 방울토마토…. 이렇게 신토불이 농작물들을 얻었다. 받고만 있을 수 없어 답례를 하나씩 준비했다. 음악 CD, 신간 시집, 색 고운 립스틱 등 '도시형'이다. 정성스레 지은 농산물과 마음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서 차 한 잔 나눌 기회가 생겼다. 앉자마자 물었다. "왜 매달 가져 오시는지…."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작년 신문에서 '할매할배의 날'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쓸쓸하게 고향을 지키는 조부모님을 손자 손녀들이 부모와 찾아뵙는 날이래요. 청소년에게는 인성 교육을, 어르신께는 삶의 보람과 자존감을 드리기 위해 경북에서 시작했답니다. '어버이날'은 일 년에 하루지만 '할매할배의 날'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래요. 그 기사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요. 도시에서 살기 급급하다는 핑계로 얼마나 소홀했는지. 주말에 아이들과 놀이공원 갈 시간은 있어도 한 시간 거리 고향집에 가기는 왜 그리 어려웠는지. 메주 냄새 퀴퀴한 황토방에서 주름 깊은 얼굴의 어르신들 품에 손주들이 파고들면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별 탈 없이 계신지 전화 한 번 드리는 것으로 자식 노릇 다한 것으로 여겨온 데 대해 반성했어요. 설·추석이나 생신 때 찾아뵈었을 뿐 늘 말없이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잊고 지냈지요. 그래서 남편과 다짐했지요. 어지간하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아이들 데리고 가자고. 가끔은 하루 자고 오자고. 그래서 그달 '할매할배의 날' 아침에 피자 한 판 사 들고 예고 없이 우르르 찾아뵈었더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시어머님께서는 들뜬 표정으로 '한 해 농사 대풍 들어도, 마을에서 경로잔치 열려도 손자 손녀 한번 보는 것만 못해…' 하시며 두 녀석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셨어요. 아마 이래서 명필 김정희 선생도 '늙어서 가장 큰 기쁨은 손자들 재롱을 보는 농손(弄孫)'이라 했나 봐요."

'효도 특강' 같았다. 그렇게 한나절 함께한 자식들이 돌아갈 때 차에 이것저것 챙겨 실어주신 '부모 마음'을 우리 집으로도 가져온 것이다. 역사가 토인비는 "한국 문화가 인류 문명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효도"라고 했다. 효도는 우리의 빛나는 문화다.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식들도 좀 더 바르고 어질게 성장한다고 믿는다면 '할매할배의 날'이 삭막한 이 시대의 희망 에너지가 되어 줄 것이다. 이달의 '할매할배의 날'은 28일이다. 바로 시작해보자.

이현경 디자인 회사 밝은사람들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