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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황장엽 작품이라지만…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앤 셜 리 2017. 12. 3. 18:49

내가 한평생 살며 알고 사귄 인물 가운데 황장엽은 유독 친형처럼 느껴지던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평안남도 강동이 내가 태어난 맹산에서 그리 멀지도 않다. 황장엽은 내 형보다 1년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징병을 면했으나 그 대신 징용에 끌려갔다. 일본 중앙대학에 다니다가 징용으로 끌려가 삼척 탄광에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그는 서울에 와서 일자리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평양에 있는 모교 도립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똑똑한 사람이라 노동당은 그를 당원으로 끌어들였고 어쩔 수 없이 당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정당인이 됐다. 그는 김일성 대학에서 수학하고 우수 학생으로 선발돼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55년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에 돌아와 김일성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됐고 나중에는 총장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나는 이 나라의 격동기를 살면서, 공산주의에 물들었던 사람이 그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정부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자들의 전향을 권하고 전향한 그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포섭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과정을 거친 자들조차도 낡은 이념을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장엽은 사상적으로 전향한 뒤 당의 요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망명한 것일까? 그가 일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그길로 베이징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 의사를 밝혔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한국으로 직송하기 꺼린 중국 정부 요청에 따라 우리 정부는 그를 일단 제3국인 필리핀에 잠시 보냈다. 황장엽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97년 4월 20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활극이 가능했을까? 내가 그런 의심에 젖어 있던 어느 날, 우리 육군 한 정보기관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가 황장엽 선생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데, 황 선생이 김동길 교수를 한번 만나게 해줄 수 없느냐고 하셔서 연락을 드립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다고 전했고 우리 만남은 군의 한 막사에서 곧 이루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받은 강한 인상은 두 눈이 바이칼 호수처럼 맑다는 것이었다. 단둘이 앉아서 장시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그가 본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철학 공부를 여러 해 함께한 이동복씨의 생각도 나와 비슷한 것이었다. 황장엽은 모스크바대학에 가서 공부를 시작한 초기에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모순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변증법대로 설명하자면 '테제'(正)와 '안티테제'(反) 사이의 갈등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철학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되고 그런 사회가 출현함과 동시에 변증법적 충돌이 끝난다는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황장엽은 깨달았던 것이다.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는 인생 어느 때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한 적이 없었다.

김일성대학에서 그가 가르치던 때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집대성해 원고지 1600장에 옮겨 김일성에게 먼저 한번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이후 황장엽이 김일성을 만났을 때 물었다. "제 글을 읽어보셨나요?" 김일성이 웃으며 "한두 장 읽어보니 지루해서 못 읽겠더라" 대답했다고 한다. 그 뒤 황장엽의 논문을 김정일이 가져다가 황장엽이 주창한 '인간 중심'을 빼고 그 자리에 '주체사상'을 집어넣어 황장엽의 이론처럼 선전했다. 그뿐 아니라 권력 세습 가능성까지도 삽입해 황장엽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념으로 개조했다는 것이다.

내가 황장엽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내 생일인 2010년 10월 2일 우리 집 마당에서였다. 손님들이 많았던 탓에 오래 함께하지도 못했다. 그는 젊었을 때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탓인지 헤어질 때 우리 풍습에는 없는 포옹을 했다. 친형처럼 느껴지던 그의 양복 겉저고리 안주머니에 내가 얇은 봉투를 넣어 드리면서 "안녕히 가세요" 했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맑은 두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강연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던 그해 10월 10일, 아침마다 좌욕을 즐기던 그는 좌욕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외국에 있던 나는 그의 빈소를 찾아보지도 못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님에도 유물론자처럼 살아야 했던 그의 비극적 삶, 김일성 눈에 들어 그 대학 총장까지 지내야 했던 황장엽, 그는 김일성을 존경한 적도 없었다. 그가 스스로 조국이라고 불렀던 대한민국조차 그를 자유롭게 살게 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유가 있다고 믿었던 남쪽으로 넘어왔지만 뒤따라 탈북을 시도했던 그의 아들은 붙잡혀 총살당했고 아내와 딸은 그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고 들었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반드시 승리할 날이 온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모든 희생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 결과, 88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조용히 마감하고 하염없이 험하고 먼 길을 홀로 떠난 것이었다. 인생의 가시밭에 쓰러져 피 흘리던 황장엽, 오로지 죽음만이 그에게 안식을 안겨준 것이라고나 할까.




기고자: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