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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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필드’ :

앤 셜 리 2010. 6. 1. 23:25

킬링 필드’ :

 

 1976년 캄보디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에서 폴 포트 총리는 1960년 자신이 주도해 만든 ‘캄보디아 노동당’ 창설일을 당(黨)의 생일로 삼자고 했다.

 당 간부 케오 미아스와 논 수온은 1951년 결성됐던 ‘크메르 인민혁명당’ 창설일로 맞섰다.

 폴 포트는 두 정적(政敵)을 배반죄로 처형하곤 ‘악덕 세균 색출’을 내세워 숙청에 들어갔다.

 2000년 불교왕국 캄보디아는 3년 동안 죽음의 땅 ‘킬링 필드(Killing Field)’가 됐다.

 ▶‘브러더 넘버 원’(인민의 맏형)

 폴 포트는 ‘넘버 투’ 누온 체아 당 부서기장과 ‘넘버 스리’ 이엥 사리 외무장관을 앞장세웠다.

 이들은 앞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와 군인, 당내 반대파, 교수·교사·의사·약사·예술인을 ‘세균’으로 점찍었다.

 영어를 하고 안경을 쓴 대졸자, 얼굴과 손이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 외국 책을 갖고 있는 사람,

피아노나 기타를 치는 사람, 뚱뚱한 사람을 부르주아로 몰아 죽였다.

 ▶‘투올 슬렝’

이라는 형무소 겸 처형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전기고문을 받고 다른 ‘세균’을 3명씩 적어내야 했다.

 부모 자식 형제가 보는 앞에서 그들의 자식 부모 형제가 죽어갔다.

 

 처형자들은 “총알이 아깝다”며 개머리판과 몽둥이, 곡괭이를 썼다.

 시체는 과수원의 가로·세로 3m, 높이 1.5m 구덩이 200여 개에 파묻었다. 죽음의 들판 ‘킬링 필드’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전국에서 100만명이 넘었다.

 ▶‘킬링 필드’

 주범들을 심판하는 국제재판이 3일 시작됐다.

 캄보디아 법관 17명과 국제재판관 13명은 일단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폴 포트는 1998년에 죽었다.

 나머지 주모자들도 대부분 종적을 감췄거나 폴 포트에게 책임을 떠밀고 있다.

 걱정스럽게도 피해자인 캄보디아 사람들부터가 ‘킬링 필드’를 잊어가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작년에 학살 피해자 유골을 모아둔 ‘체옹에크’ 묘소와 기념관의 관리권을 일본 기업에 팔아넘겼다.

 ‘투올 슬렝’은 베트남 기업이 관광지로 개발한다.

▶젊은 세대는

 ‘킬링 필드’를 겪은 부모들에게 “왜 정권에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되묻기 일쑤라고 한다.

 그러나 ‘킬링 필드’를 목격한 사람들 중엔 지금도 ‘시각거부증’을 앓는 이가 많다.

차마 못 볼 참극을 보고 난 뒤 얻은 신경성 시작장애다.

27년 만의 재판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세월 속에 잊혀져 가는 망자(亡者)와 가족들만 불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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