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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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즈카 父子

앤 셜 리 2010. 6. 1. 23:26

• 후지즈카 父子

 2006.07.10 /

 폭 60㎝ 남짓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엔 10m 넘는 두루마리가 달려 있다.

 청(淸) 문인들의 찬시(讚詩)부터 우리 학자들의 배관기(拜觀記)까지 20명이 바친 글이다.

 위창 오세창은 세한도의 극적인 귀국을 두고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가 국보를 찾아왔노라’고 썼다.

 서예가 손재형은 1944년 후지즈카 지카시(藤塚?)의 도쿄 집을 찾아 100일을 매일 문안하며 세한도를 넘겨 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거저 내줬다. 석 달 뒤 후지즈카 집은 미군 공습으로 불탔다.

후지즈카는 중국철학을 전공했지만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오면서 추사에 매료됐다.

 “추사는 조선 500년에 보기 드문 영재”라고 했다.

 그는 서울과 베이징의 고서점을 훑으며 추사 유품과 자료를 사 모았다.

 1932년 서울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추사 사후 처음 열린 ‘완당 유묵·유품전’에 16점을 내놓았을 정도다.

그의 도쿄대 박사논문 주제도 추사였다.

 그런 그가 세한도를 내주며 한 말은 “잘 보관해 달라”는 한마디뿐이었다.

62년 만인 올해 초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明直)는 과천시에 추사의 미공개 편지 20여 점을 비롯한 문화재 2700점을 기증했다.

“받아서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에게 줘야 유물의 생명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한국이라고 믿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아들 후지즈카는 서울중 전신 경성공립학교를 다녔다.

 도쿄대에선 아버지처럼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고교 교사와 대학 강사로 일하다 20년 전 은퇴했다.

그가 지난 4일 도쿄 병원에서 외롭게 숨을 거뒀다.

자식이 없는 후지즈카는 3년 전 아내마저 앞세워 홀로 투병해 왔다고 한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그는 아버지의 수집품을 돈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천문화원의 추사 자료실에 써 달라며 200만엔을 보탠 그다.

 ▶그는 추사 유품을 돌려보낸 뒤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사람이 공수래(空手來)는 못해도 공수거(空手去)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곧 마지막 병상에 누울 것임을 예감한 듯했다.

그 말처럼 그는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떠났다.

 그러나 후지즈카 부자가 남긴 추사 사랑과 대 이은 문화재 반환은 살얼음판 같은 두 나라 관계를 넘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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