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깨우침의 말씀

[스크랩] 아름다운 마무리(全文)

앤 셜 리 2010. 8. 17. 19:52
    아름다운 마무리(全文) 오늘 오후 채소밭을 정리했다. 고랭지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오이넝쿨과 고춧대와 아욱대 등을 걷어 냈다. 여름날 내 식탁에 먹을 것을 대 주고 가꾸는 재미를 베풀어 준 채소의 끝자락이 서리를 맞아 어둡게 시들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가꾸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그 물음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 중요한 자각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내려놓지 못할 때 마무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와 반복의 여지를 남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진정한 내려놓음에서 완성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은 놀이를 회복하는 것. 심각함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자연과 대지, 태양과 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되찾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자연뿐임을 아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 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난다.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마무리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한다. 그것은 삶에 새로운 향기와 빛을 부여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맑은 가난과 간소함으로 자신을 정신적 궁핍으로부터 바로 세우고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할 줄 안다. 불필요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안다. 문명이 만들어낸 온갖 제품을 사용하면서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가, 나는 이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머지않아 늦가을 서릿바람에 저토록 무성한 나뭇잎들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빈 가지에 때가 오면 또다시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삶에 저항하지 말라 올 여름에는 거의 책을 보지 않는다.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책을 가까이 접할 수도 없지만 비슷비슷한 소리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돋보기를 맞추어 쓴 지가 10년도 훨씬 넘기 때문에 눈이 쉬이 피로해져서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활자로 박힌 남의 글보다는 나 자신을 읽고 들여다보는 시간이 보다 소중하게 여겨진다.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뜻밖에 묵은 일기장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충 훑어보면서 내 삶의 자취가 빛이 바랜 사진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5년 6월 17일(토요일), 남불 생 레미에서 쓴 대목. 여행 중에 가지고 간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집>>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었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저항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장벽을 쌓아 두지 말라. 온갖 사소한 충동, 강제와 욕구로부터 그리고 그 자질구레한 모든 갈등과 위선으로부터 진정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거라. 그러면 팔을 활짝 벌리고 삶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다시 채소를 가꾸며 어떤 학자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조주 선사의 대답. “방하착(放下着, 내던져 버려라. 놓아 버려라)!”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아 버리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고 가거라!” 그 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겉으로는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버린 것이 아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노년의 아름다움 요즘 <<계로록(戒老錄)>>, 노년에 경계해야 할 일들을 읽고 있는데 나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돌이켜보니 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같은 말을 되풀이해 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의 늪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노력이 결여되었다는 그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무엇보다도 먼저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꼭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더미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살림살이를 시시로 점검하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손대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니 아낌없이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병상에서 배우다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환자에게는 치유가 되겠다는 생각. 우리들의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을 어디 가서 고치겠는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런 병원에서의 시간이야말로 성급하고 조급한 생각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뒤부터는 기다리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시간에 화두삼매(話頭三昧, 나의 마음과 화두가 하나가 된 상태)에 들 수 있고 염불로써 평온한 마음을 지닐 수도 있다. 어느 암자의 작은 연못 아름다움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이런 시가 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 없네 바람에 일렁이는 대와 뜰과 달과 연못이 한데 어울리면서도 서로 거리낌이 없는 이런 경지가 아름다움이 지닌 오묘한 조화이다. 뛰어난 장인(匠人)은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안에서 솟아난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자신에게 알맞은 땅을 며칠 전 불일암에 다녀왔다... 30여년 전 이 암자를 지을 때 손수 심어 놓은 나무들의 정정한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한 생각이 차오른다. 후박나무, 태산목, 은행나무, 굴거리와 벽오동 등이 마음껏 허공으로 뻗어 가는 그 기상이 믿음직스럽다. 사람은 늙어가는데 나무들은 정정하게 자란다. 사람이 가고 난 뒤에도 이 나무들은 대지 위에 꿋꿋하게 서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한 아름이 된 후박나무를 안아 주었다. 안거가 시작되는 결제날, 홀로 지내는 암주에게 이런 사연을 보냈다. <장로게>에서 한 수행자는 이와 같이 읊었습니다. 홀로 있는 수행자는 범천(梵天)과 같고, 둘이서 함께라면 두 사람의 신(神)과 같으며, 셋이면 마을 집과 같고, 그 이상이면 장바닥이다. 올 여름 범천이 기뻐할 안거 이루기를.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기를. 부디 청청(靑靑)하시오. 삶의 기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스승의 대답. “시간 낭비하지 말라. 네가 숨이 멎어 무덤 속에 들어가거든 그때 가서 실컷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왜 지금 삶을 제쳐두고 죽음에 신경을 쓰는가.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 있는 삶이다. 삶의 기술이란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깨어 있는 관심이다. 모든 것은 끊임 없이 흐르고 변한다. 사물을 보는 눈도 때에 따라 바뀐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삶은 유희와 같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약한 것이 강한 것에 먹히는 세상에서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가 부족들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이른바 미개사회의 가치의식에 대한 몇 가지 일화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학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농부들에게 비료를 갖다 주었다. 농부들이 처음 본 그 비료를 밭에 뿌렸더니 전에 없던 풍작이었다. 농부들은 그 부족의 지혜로운 눈먼 추장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는 작년보다 두 배나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추장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농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이들아. 매우 좋은 일이다. 내년에는 밭의 절반만을 갈아라.” 그들은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원치 않았다. 다음 이야기는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보잘것없는 도구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나무를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는 큰 도끼를 하나 주었다. 다음해에 원주민들이 그 도끼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기 위해 다시 그 마을을 찾았다. 그들이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에워쌌다. 그때 추장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들이 이 도끼를 보내 준 다음부터 우리는 더 많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모자랄까 봐 미리 준비해 쌓아두는 그 마음이 곧 결핍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날그날의 삶을 즐길 줄 알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의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 때깔 고운 도자기를 보면 풋중 시절부터 나는 안거가 끝나고 해제가 시작되는 바로 그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일찍 길 떠나기를 좋아했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김이 빠져나간 후에 길을 떠나면 나그넷길의 그 신선감이 소멸되고 만다... 선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후원에서 미리 아침공양을 대충 때우고 첫차를 타기 위해 걸망을 메고 동구길을 휘적휘적 나서면 새벽달이 숲길을 훤히 비춰 주었다. 이 또한 해제의 일미(一味)다. 만일 첫차가 아니고 두 번째 차편이나 밝은 대낮에 길을 떠나면 해제의 그 맛이 시들해진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서양에서 수도원다운 수도원을 최초로 세운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지난 겨울 이 거처에서 다시 펼쳐 보면서 많은 위로와 각성의 기회를 가졌다... 성 베네딕도는 뒷날 몬떼 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워 보다 나은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추려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항상 살피라. 하느님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공허한 말,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하지 말라. 다툼이 있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화해하라. 홀로 걸으라. 행복한 이여 그 전에 읽다가 접어 둔 비노바 바베의 <바가바드기타> 강론 <천상의 노래>를 다시 펼쳐 들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충직하고 헌신적인 제자인 그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같은 동료들의 요청으로 <바가바드기타>를 강론하게 되었다. 그는 영국의 식민통치 하래서 모두 합쳐 5년 동안을 각기 다른 감옥에서 지내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그의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비노바 바베 나는 굶어 죽어 가는, 가난한 자의 모습을 하고 오신 신을 당신네 가족으로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의 가족이 넷이라면 그를 다섯번째 가족으로 여기고, 당신의 땅 5분의 1만 내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요.”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지주들을 설득하여 4백만 에이커의 토지를 헌납 받아 땅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온 세계를 감동시켰다. 간디는 일찍이 그를 가리켜 ‘인도가 독립되는 날 인도의 국기를 맨 처음 게양할 사람’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비노바 바베의 생애는 암담한 인류사회에 희망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 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 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 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오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 승가에 결제, 해제와 함께 안거 제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결제 기간과 해제 기간은 상호 보완한다. 결제만 있고 해제가 없다면 결제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해제만 지속된다면 안거 또한 있을 수 없다... 이제는 다시 산의 살림살이에 안주할 때가 되었다. 옛 선사의 법문에, 때로는 높이높이 우뚝 서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 有時高高峰頂立 有時深深海底行 이런 가르침이 있는데, 안거 기간은 깊이깊이 잠기는 그런 때다. 그 잠김 속에서 여물어야 다시 우뚝 솟아오를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 해인사에서 10여년을 살면서 수행자의 터전을 닦던 풋중 시절, 구참스님들로부터 보고 듣고 익히면서 배운 그 덕이 결코 적지 않았다... 지금도 홀로 사는 나는 받쳐주는 저력이 있다면 장경각 법보전에서 조석으로 기도하던 그 힘이라고 생각된다. 큰 법당에서 대중 예불이 끝난 후 혼자 장경각에 올라가 백팔 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는 일로 그날의 정신적인 양식을 마련했었다. 기도는 꾸준히 지속하는 그 정진력에 의미가 있다. 어쩌다 도중 한두 번 거르게 되면 기도의 리듬이 깨뜨려지기 때문에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법보전 주련에는 지금도 이런 법문이 걸려 있다. 부처님 계신 곳이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책의 날’에 책을 말한다 오두막 살림살이 중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들라면 읽고 싶은 책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쾌적한 상태에서 읽고 있을 때, 즉 독서삼매에 몰입하고 있을 때. 내 영혼은 투명할 대로 투명해진다. 이때 문득 서권(書卷)의 기상이 나를 받쳐준다. 어떤 그림이라 글씨에서 작가의 기량을 엿보려면 이 ‘서권기와 문자의 향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가늠할 수 있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일지라도 거기에 얽매이면 자신의 눈을 잃는다. 책을 많이 읽었으면서 콕 막힌 사람들이 더러 있다. 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을 때 열린 세상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책에 읽히지 않고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책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 자신의 그릇만큼 벽에 걸어 두었던 족자를 떼어 내고 빈 벽으로 비워둔다. 그 빈 공간에 그림 없는 그림을 그린다. 그 자리에 무엇을 걸어 둘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넉넉하다.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여백의 운치를 누리고자 해서다... 차지하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우리는 가난해진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실제로 소유한 것이 적더라도 안으로 넉넉해질 수 있다.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호숫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그리움의 터, 그 월든에 다녀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근교에 있는 월든은 10월말 단풍이 한창이었다. 맑은 호수에 비친 현란한 단풍을 대하자 다섯 시간 남짓 달려온 찻길의 피로도 말끔히 가셨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둘레 1.8마일,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3킬로미터 조금 못 미치는 거리다. 평일인데도 호반에는 드문드문 방문객들이 있었다. 그 현장에서 <<월든>>을 읽는 여인도 있고, 고무보트를 타고 한가로이 낚싯줄을 드리운 사람도 눈에 띄었다. 차가운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도 두엇 있었다. 호수의 북쪽에 150여년 전 소로우가 살았던 오두막의 터가 돌무더기 곁에 있다. 거기 널빤지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한번 내 식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즉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인생이 가르치고자 한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소로우 월든 호숫가에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널빤지. 소로우의 생활신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 그때 비로소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도 가난이 아니게 된다. 그대의 삶을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한다 살 만큼 살다가 명이 다해 가게 되면 병원에 실려 가지 않고 평소 살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이미 사그라지는 잿불 같은 목숨인데 약물을 주사하거나 산소호흡기를 들이대어 연명의술에 의존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다... 현대 의술로도 소생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조용히 한 생애의 막을 내리도록 거들고 지켜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 수 있도록 이웃들은 거들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도 미리 배워 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맞이해야 할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말씀을 찾아 법회를 마치고 나면 내 속은 텅 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쏟아 놓고 나면 발가벗은 내 몰골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런 때는 혼자서 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개울물 소리를 듣고 싶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나는 홀로 있고 싶다. 남자 불자 한 분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더니 가사 장삼을 벗어 놓기가 바쁘게 가지고 온 책을 한 권 펼치면서 ‘좋은 말씀’을 한마디 거기에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좋은 말이 될 것 같아 쏟아 놓았는데 그에게는 별로 좋은 말이 못 된 것 같았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화두 삼아 지닐 테니 부득부득 써 달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써 주었다. 그는 이 말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다시 좋은 말씀을 써 달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좋은 말씀’이라고 종이에 가득 찰 만큼 크게 써 주었다. 우리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어 여기저기 찾아 다닌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번번이 실망하기 일쑤다. 도대체 그 좋은 말씀이란 무엇인가? 또 어디에 좋은 말씀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씀도 내게는 무연하고 무익하다. 그리고 좋은 말씀(좋은 가르침)은 사람의 입을 거쳐서만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천지만물이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지 않은가. 말씀(가르침)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메아리가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일상적으로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무익하다. 새 말씀을 들으려면 지금까지 얻어들어 온 말씀들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거기에 갇혀 있거나 걸려 있으면 새로운 가르침이 들어설 수 없다. 예술의 용어를 빌리자면 ‘창조적인 망각’이라고 한다. 텅텅 비워야 비로소 메아리가 울린다는 소식이다... 좋은 말씀은 어디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씀이 살아 숨쉰다. 명심하라. 바라보는 기쁨 너무 가까이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비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에 그 사람의 본질(실체)을 놓치기 쉽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늘 한데 어울려 치대다 보면 범속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신선감을 지속할 수 있다. 걸핏하면 전화를 걸고 자주 함께 어울리게 되면 그리움과 아쉬움이 고일 틈이 없다... 좋은 만남에는 향기로운 여운이 감돌아야 한다. 그 향기로운 여운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어떤 주례사 나는 내 생애에서 단 한 번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주례를 3년 전 6월 어느 날 선 적이 있다... 삶의 동반자로서 원활한 대화를 위해, 부모님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숙제를 내 주겠다. 숙제 하나,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1권을 밖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 읽는다. 산문집은 신랑 신부가 따로 한 권씩 골라서 바꿔 가며 읽고 시집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해서 하루 한 차례 적당한 시간에 번갈아 가며 낭송한다. 가슴에 녹이 슬면 삶의 리듬을 잃는다. 시를 낭송함으로써 항상 풋풋한 가슴을 지닐 수 있다. 사는 일이 곧 시가 되어야 한다. 숙제 둘, 될 수 있는 한 집 안에서 쓰레기를 덜 만들도록 하라. 분에 넘치는 소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악덕이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예 집 안에 들여놓지 말라. 광고에 속지 말고 충동구매를 극복하라. 가진 것이 많을수록 빼앗기는 것 또한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적게 가지고도 멋지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숙제의 이행여부는 이 다음 삶의 종점에서 그들의 내신정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또 한 해가 빠져나간다 인도에서 불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생긴 자이나교는 불살생계를 엄격하게 지키는 종교이다. 그들은 도덕적인 고행 생활을 강조한다. 그들에게는 1년에 한 번 ‘용서의 날’이 있다. 그날 자이나교도는 지난 핸 해를 돌아보고 땅과 공기, 물과 불, 동물과 사람 등 모든 존재에게 해를 끼친 행동을 낱낱이 기억해 내면서 하루 동안 단식을 한다. 이와 비슷한 의식은 일찍이 불교 교단에서도 행해졌다. 자자(自恣)가 그것이다. 안거가 끝나는 날, 대중이 선출한 자자를 받는 사람 앞에 나아가 안거 중에 자신이 범한 잘못이 있다면 기탄없이 지적해 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세 번 거듭하여 만약 잘못이 있어 지적당하면 그 자리에서 참회한다. 수행자 뿐만 아니라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기거동작이 밝고 활달하고 분명해야 한다. 어둡고 음울하고 불분명함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만나는 이웃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 해가 기우는 길목에서 다 같이 명심할 일이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얼마 전에 그전에 살던 암자에서 가서 며칠 묵고 왔다... 다락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 장의 걸레를 발견하고 낯익은 친구를 만난 듯 만감이 새로웠다. 이 걸레는 암자가 세워진 그날부터 함께 지내온 청소 도구이다. 1975년 10월에 이 암자가 옛터에 새로 지어졌는데 그때 한 노보살님이 손수 걸레를 만들어 가져오셨다. 그곳에는 내가 다래헌 시절에 쓰던 양은 대야 두 개가 아직도 건재하다. 하나는 발을 씻거나 걸레를 빨 때 쓰는 하복대야이고, 이보다 조금 큰 것은 상복대야로 세수를 할 때 쓴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하복대야 가장자리에 ’67.12.3’이라고 새겨 놓았다. 못을 대고 장도리로 또닥거려 점선으로 새겨놓은 것이다. 37년 동안 세월의 풍상에 씻겨 많이 찌그러지고 벗겨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야로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요즘은 절에서도 이런 검약한 가풍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넘치는 물량 공세가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위채 부엌문 한쪽 기둥에는 낡은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 뒤쪽 판자에 붓글씨로 ‘72년 7월 13일 손수 삭발 기념’이라고 씌여 있다... 때가 되면 우리 방에 와서 삭발해 주던 스님이 무슨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마음을 내어 손수 삭발을 시도했다... 그길로 동대문 시장 유리집에 가서 지금 거울을 사 온 것이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차 덖는 향기 인도 출신으로 녹색운동의 영성적 지도자인 사티쉬 쿠마르... 는 20대의 젊은 시절, 어느날 신문을 읽다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 경이 핵무기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는 기사를 보고 큰 자극을 받는다. ‘그는 90세의 나이에 세계평화를 위해 감옥에 갇혔다. 26세의 젊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티쉬 쿠마르는 자신은 26세의 노인이었고 그는 90세의 젊은이였다고 술회한다. 사티쉬 쿠마르 녹색연합 홈페이지. 그는 이날의 충격으로 한 친구와 함께 인도의 뉴델리를 출발하여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으로 세계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다른 교통수단은 이용하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가기로 결심한다. 2년 반 동안 8천 마일을 걸으면서 땅을 밟고 꽃향기를 맡으면서 나무와 강을 바라보고 산과 사막을 지나다니면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경험한다. 그가 러시아를 여행할 때 여성 두 사람에게 평화의 메시지가 적힌 전단지를 건넨다... 전단지를 받아본 그 여성들은 인도에서 모스크바까지 돈 한 푼 업이 걸어서 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자신들이 근무하는 차 공장으로 데리고 가 차 대접을 한다. 그곳에서 나올 때 네 개의 차 묶음을 주면서 그들은 말한다. 하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수상에게 주고, 한 묶음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한 묶음은 영국 수상에게, 마지막 한 묶음은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메시지도 함께 담아 부탁한다. “저희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핵무기의 단추를 눌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잠시 멈추고 이 신선한 차를 한 잔 마시라는 것입니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요즘에 이르러 받는 일보다도 주는 일이 더 즐겁다. 이 세상에서 받기만 하고 주지 못했던 그 탐욕과 인색을 훌훌 털어내고 싶다. 한동안 내가 맡아 가지고 있던 것들을 새 주인에게 죄다 돌려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기 바란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것이 출세간의 청백가풍(淸白家風)이다. 무엇이 사람을 천하게 만드는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던 고려시대보다도 갖은 천대와 박해를 받던 조선시대에 뛰어난 수행자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동서양의 종교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종교는 정치 권력을 등에 업을 때 가장 반종교적으로 타락했고, 체제로부터 박해 받을 때가 가장 순수하게 제 기능을 하면서 성정할 수 있었다. 불타 석가모니는 <숫타니파타>에서 ‘천한 사람’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얼마 안 되는 물건을 탐내어 사람을 죽이고 그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의 이익이나 남을 위해서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가진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늙고 병든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 상대가 이익이 되는 일을 물었을 때, 불리하게 가르쳐 주거나 숨긴 일을 발설하는 사람.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성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그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 예의로써 보답하지 않는 사람. 사실은 성자(깨달은 사람)도 아니면서 성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그는 전 우주의 도둑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임종게와 사리 일찍부터 선가에서는 ‘마지막 한마디’ - 이를 임종게(偈) 또는 유게(遺偈)라고 한다- 를 남기는 일이 죽음의 무슨 의례처럼 행해지고 있다. 그것은 대개 짧은 글 속에 살아온 햇수와 생사에 거리낌이 없는 심경을 말하고 있다... 13세기 송나라 조원(祖元) 스님은 이런 임종게를 남겼다. 부처니 중생이니 모두 다 헛것 실상을 찾는다면 눈에 든 티끌 내 사리 천지를 뒤덮었으니 식은 잴랑 아예 뒤지지 말라 고려말 백운 경한 스님은 이렇게 읊었다. 사람이 칠십을 사는 일 예로부터 드문 일인데 일흔일곱 해나 살다가 이제 떠난다 내 갈 길 툭 트였거니 어딘들 고향 아니랴 무엇 하러 상여를 만드는가 이대로 홀가분하게 떠나는데 내 몸은 본래 없었고 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 버리고 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 책에 읽히지 말라 옛 스승의 가르침에 ‘심불반조 간경무익(心不反照 看經無益)’이란 말이 있다.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으로 돌이켜 봄이 없다면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 읽히는 경우이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책이 나를 읽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는 선뜻 책장을 덮고 일어서야 한다. 밖에 나가 맑은 바람을 쏘이면서 피로해진 눈을 쉬게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기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책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한 책이 나를 떠나야 한다. 표현을 달리 하자면, 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책을 제대로 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그 좋은 책의 내용이 나 자신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때 문자(文字)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기상이 내 안에서 움트고 자란다. 뒷 표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삶의 매듭들이 지어진다. 그런 매듭을 통해서 안으로 여물어간다. 흔히 이 육신이 내 몸인 줄 알고 지내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면 내 몸이 내가 아님을 인식하게 된다. 내 몸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하면서 속으로 염원했다. 이 병고를 거치면서 보다 너그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이해심 많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다. 묵묵히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을 바라보고 더러는 거칠거칠한 줄기들을 쓰다듬으며 내 속에 고인 말들을 전한다. 겨울 나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 오른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거듭거듭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天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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