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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문학산책] 스무살 박완서가 꿈꾼 찬란한 봄

앤 셜 리 2012. 2. 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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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는 1998년 나이 예순여덟에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원숙한 작가의 시선으로 그린 단편이 많이 실렸다.

그때 박완서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집으로 찾아간 나는 "이번에 내신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노인들의 일상을 주로 다뤘는데, 의외로 젊은 독자도 많이 읽는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순간 '의외로'란 부사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박완서는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노인만 읽으란 법이 있나요."

박완서는 지난해 1월 22일 여든한 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원로 작가'로 불리길 마뜩잖아했다. 일흔일곱 살에 낸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노년의 다양한 초상을 그려냈지만 역시 젊은 독자들까지 사로잡았다.

노련한 이야기 솜씨뿐 아니라 삶의 속내를 들추어내는 날카로운 언어감각이 싱싱한 흡인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홀로 망망대해로 나가 커다란 청새치를 낚아내고 상어떼와 사투(死鬪)를 벌인다.

마찬가지로 박완서 문학의 바다에서도 노인들은 욕망과 열정을 느슨하게 풀어놓지 않는다. 몸은 늙어도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은 노화(老化)를 모르는 세속의 풍속도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거기에 담긴 인간의 조바심과 욕심과 불안을 능숙하게 눙치는 게 박완서식 '실버 문학'의 묘미였다.

박완서의 1주기를 맞아 유작(遺作) 소설집 '기나긴 하루'와 22권으로 된 '박완서 소설 전집 결정판'이 나왔다. 1970년 그의 데뷔작인 장편 '나목(裸木)'의 세로쓰기 판형을 복원한 특별 한정판도 나왔다. 돌이켜보면 박완서는 문단에서 원로 작가로 불리지 않았지만, 젊은 작가란 소릴 들은 적도 없다.

그는 1남4녀를 낳고선 1970년 나이 마흔에 늦깎이 작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마흔은 중년이 아니라 청년의 연장기에 가깝다. 그래서 재출간된 데뷔작 '나목'을 통해 박완서는 젊은 작가로 되돌아왔다.

'나목'은 6·25전쟁 때 스무 살이었던 박완서가 미군 부대에서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렸던 박수근과 만난 일을 소재로 삼아 쓴 소설이다. 박완서는 원래 박수근에 관한 논픽션을 쓰려고 했다가 "글을 쓰면 쓸수록 자꾸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에 끌려 소설을 완성하고 말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스무 살 여성은 포성이 가깝게 들리는 서울에서 생존에 만족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구질구질한 현실 너머의 생기(生氣) 있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청춘을 할퀴고 간 전쟁을 증오한 나머지 그녀의 내면은 일그러진 상태다.

인간의 행복을 향해 위악적(僞惡的) 적개심을 선연히 드러낸다. 전쟁이 더 커져서 그녀가 겪은 재앙이 다른 이들에게도 골고루 분배되길 원한다. 동시에 확전(擴戰)이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모순된 감정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녀는 중년의 화가를 사랑하면서 예술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고 위로받으려고 한다. 순도(純度)가 높은 사랑일수록 실현되기는 어렵다. 주인공은 관습의 누더기를 벗어던져 남루한 자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젊은 미군의 품에 안기려고도 한다. 그러나 포탄에 붉은 핏덩어리로 찢겼던 오빠들의 최후가 눈앞에 떠오른다. 그녀는 끔찍한 환각의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온다. 젊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냉소와 위악으로 현실에 저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가난한 청춘의 무기력뿐이다.

그러나 소설 '나목'은 1951~1952년, 그해 겨울에 우리 모두 추위에 내몰린 벌거벗은 나무처럼 외로웠지만 찬란한 봄을 꿈꿨다고 회상한다.

40여 년에 걸쳐 쌓인 박완서 문학의 성채(城砦)에서 '나목'이 가장 높은 곳에 솟아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박완서 문학은 변화하는 시대의 풍속도를 기민하게 포착하면서 진화를 거듭해 갈수록 더 빼어난 언어 연금술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첫 소설을 내지만, '나목'처럼 오래 읽히는 데뷔작을 남기긴 힘들다. 박완서는 "얄팍한 명예욕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목'을 다시 펼치면서 문학에 대한 때 묻지 않은 동경(憧憬)을 돌이켰다"고 했다.

'나목'이 자기 쇄신의 원동력이었기에 박완서는 팔순까지 늘 젊은 작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노인과 바다'는 노인만 읽으란 법이 있느냐고 일갈할 만했다. 면박을 당했던 그날, 작가 앞에서 얼마나 말을 더듬었는지, 생각만 해도 다시 이마에 땀이 맺힌다.

기고자:박해현  본문자수:2280   표/그림/사진 유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