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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다치바나 다까시

앤 셜 리 2012. 2. 7. 23:36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이규원 옮김|청어람미디어|327쪽|1만8000원

'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시험당하고 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병이 내 앞을 가로막고 들이밀며 묻는다. 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강하냐고.'(131쪽)

폐암으로 타계한 일본 원로 언론인 지쿠시 데츠야(1935~2008)가 죽기 직전에 쓴 일기다. 일기 제목은 '잔일록'(殘日錄). 지쿠시는 2007년 4월 폐암 진단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 끝에 암 덩어리를 90% 줄였지만 곧바로 재발했다.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지쿠시의 죽음은 충격이자 상실이었다. 다치바나는 탐사 저널리즘의 거장이다. 그만한 속도로 읽고, 그만한 밀도로 취재하고, 그만한 문장으로 써내려가는 기자가 일본에도, 한국에도, 서양에도 손꼽을 정도밖에는 없다. 그런 다치바나가 평생 '대선배'로 존경한 사람이 지쿠시였다. 둘은 담배 연기를 뭉게뭉게 피우며 수많은 취재를 함께했다. 지쿠시는 암 진단 전까지 말보로 담배를 하루 세 갑 피웠다. 하루 두 갑씩 피운 다치바나도 그로부터 8개월 뒤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2007년 12월).

이 책은 암에 걸린 다치바나가 NHK 취재팀과 함께 암이란 무엇인가 파고든 다큐멘터리다. 암 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한 로버트 와인버거 MIT 교수를 포함해 암 연구의 석학 10여명과 수많은 암 환자를 인터뷰하고, 자신의 투병 과정도 객관적으로 기록했다.

강골(强骨)이라지만 그도 인간이다. 피오줌을 누고 도쿄대병원에 가보니 방광암 중기라고 했다. 겁이 덜컥 났다고 다치바나는 솔직히 쓴다.

동시에 그는 뼛속까지 기자였다.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만큼 알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직경 1.8㎝짜리를 포함해 암 덩어리 3개를 잘라내는 수술에 앞서 의사가 전신 마취와 하반신 마취 중 어느 쪽을 택할지 물었다. 다치바나는 후자를 택했다. 모니터로 수술 장면을 볼 수 있어서였다.

그는 암 관련 책을 잔뜩 짊어지고 입원 수속을 밟았다. 허리 아래를 마취한 뒤에도 의사에게 수술 순서와 기법을 꼼꼼히 물었다. 수첩만 안 들었지 수술대에서도 취재를 계속한 것이다. 이후 방광암 재발을 막기 위해 면역요법을 받으면서 미국과 유럽으로 총 다섯 차례 취재 여행을 갔다. 그는 '어떻게 하면 암이 낫는지'보다 '애초에 암이 왜 존재하는지' 파고들었다.

인간의 몸에는 60조개의 세포가 있다. 세포 하나하나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개월 살고, 소임을 마치면 자살한다. 그 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운다. 죽어 없어지는 세포와 새로 태어나는 세포가 균형을 이루도록 인체는 평생 1경번 세포 분열을 한다. 1경은 1조 뒤에 0이 네 개 붙은 숫자다.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분열을 계속하다 보니 확률상 반드시 오류가 생긴다. 그런 오류가 누적돼 때가 돼도 자살하지 않는 '미친 세포'가 생긴다. 암세포다. 암세포는 ①죽지 않고 끝없이 분열하면서(무한 증식), ②주변 정상 세포 속에 파고들어가(침윤), ③인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새로운 식민지를 만든다(전이).

현대의학이 잡아낼 수 있는 암은 무게 1g, 직경 1㎝가 한계다. 그 정도면 이미 암세포 숫자가 10억개는 된다. 단 하나의 암세포가 그만큼 늘어날 때까지 인간은 10~20년 까마득히 모르고 산다.

이 음험하고 끈덕진 질병에 대해 다치바나는 "암은 다세포 동물의 숙명"이라고 말한다(114~115쪽). 세포 분열 그 자체가 암의 가능성을 껴안고 있다.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생명체의 초기 발생 과정과 기초적인 세포 활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명이 가능하게 해준 바로 그 유전자가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다. 암 유전자를 박멸해 암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운 생물을 만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면 생명체 자체가 죽기 때문이다(276~278쪽).

가령 암이 항암제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유를 파고들어 가면 HIF-1이라는 유전자에 이른다. 생물에게 가장 혹독한 환경 조건은 저산소 상태인데, 그걸 극복하고 살아남는 능력이 담긴 게 HIF-1 유전자다.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캠퍼스의 랜덜 존슨 교수가 쥐의 유전자를 조작해 HIF-1 유전자를 무효화시켰더니 태아 단계에서 어김없이 죽었다. 쥐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전자라는 뜻이다(164쪽).

현대의학은 이제 겨우 암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는 단계다. 그래도 다치바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인간은 두 가지를 무기로 암과 싸우고 있다. 지식 그리고 살려는 의지다. 언젠가 반드시 암의 전모를 알 수 있는 날이 온다. 아직까지 항암제 연명효과는 평균 2개월 남짓이지만 어디까지나 '평균'이다. 환자 개개인의 대처에 따라 예후와 여명은 크게 다르다.

다치바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암에 진다 해도 애초에 인간은 죽는 동물이다. 승산이 없는 게 아니다. 투병이라는 장에서는 질지라도 투병이 곧 인생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장에서는 이길 수 있다.'(168~169쪽)

이런 담대한 생사관을 무기로 다치바나는 치열하게 취재하고 명료하게 글 쓰며 방광암 진단 5년 고비를 무사히 넘어섰다. 담배는 바로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