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때 값비싸고 커다란 제주 도미를 사 와서 혼자 구워 먹었다. 분홍빛 도미는 살지고 아름다워 젓가락을 대려는데 커다란 눈에서 기름이 눈물처럼 흘렀다. 신문 건강란에 실린 '우울한 아내에게 생선찜 차려주세요'라는 기사를 '우울한 당신에게 도미 한 마리 선물하세요'로 바꿔 읽으며,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듯 눈 밑의 살이며 아가미 끝의 살까지 찬찬히 발라먹었다. 나만을 위하여 힘들여 커다란 생선을 구운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렇게 쉬운 일을 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에 가슴까지 뭉클했다.
대부분의 주부가 그렇듯 나도 혼자 있을 땐 에너지 절약모드로 바뀌어 가능한 한 남은 음식으로 때운다. 아플 때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감기에 걸려 네댓새 몸져누웠을 때는 느려빠진 식구들이 해 주는 끼니 준비로는 제때 약을 먹을 수 없어 바나나를 며칠 동안 먹으며 "너희 ○가(哥)들 감기 걸리면 두고 보자" 하며 지냈다. 셋이서 거실에 모여앉아 TV를 보며 무엇이 그리 재미난지 소리 높여 웃다가 물 가지러 나온 나를 마치 식탐하는 노친네 보듯 두런거렸다. "너희 엄마 조심해야 돼. 괜찮다 그래도 필요한 것 없는지 자꾸 물어봐야 돼." "그렇죠? 제가 죽 사 올까 전화드렸더니 '됐다'고 하시긴 했는데, 뭔가 좀…." 딸이 그나마 나아서 "아빠가 죽 한 번 사 와서 날마다 왜 안 먹나 채근하니까 그렇지요"라고 하자 남편은 "아픈 사람은 먹고 싶은 것이 없는 법이야, 이놈아"라고 한다. 자기네들이 독감 걸렸을 때 내가 끓여준 대구지리며 삼계탕을 먹고는 "아, 살 것 같다"고 신음소리를 내던 그들의 대화였다.
지난주 주말 사흘간 독감에 걸려 누워 있을 때도 그들에겐 작년의 학습효과가 전혀 없었다. 내가 손에 닿는 대로 식빵이라도 한쪽 먹은 후 약을 먹고 잠들라치면 그때서야 자기들 주말 리듬에 맞춰 느지막이 일어나 자기네들 끼니에 맞춰 "밥 먹어야지. 그래야 감기가 낫지. 뭘 시킬까?" 하며 깨우기 일쑤였다. 그러곤 급기야 신경질을 내고 마는 나를 해가 가도 여전히 인내의 덕을 쌓지 못하는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그런데 올해는 왠지 서러웠다. 분한 게 아니라 서러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남편이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양옆에 끼고 TV라도 보며 내가 혼자 아프게 내버려두면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들이 내 키보다 크게 자라고 내가 아프면 잔소리가 없어 더 신난다는 듯 각자 방에서 잘 지내고부터는 조금씩 분한 마음이 생겨났지만, 올해처럼 서러운 마음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서러웠을까?
나이 쉰이 되었을 때 나는 50세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겁도 없이 '아름다운 중년을 위하여'라는 짧은 에세이를 썼다. '손마디가 아프기 시작해 갓 배운 빵 반죽의 즐거움도 없어졌지만 벌레 먹은 나뭇잎의 아름다움마저 선연히 눈에 보이니, 더욱이 젊은 애들과는 달리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니 얼마나 좋으냐고.' 그때는 그랬다. 아름다운 중년의 끝자락이라고 우기며 견딜 만했다. 사춘기의 딸과도 소리 지르며 버틸 힘이 있었고, 나를 '보수 꼴통'이라고 부르면 "우리도 너희 못지않은 열혈 신세대였어"라며 도도하게 무시할 기세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 예순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이루 말할 수 없기 시작함에 더해, 잘해야 '영 시니어'라는 사실이 집 안팎에서 새록새록 절감되는 것이다. 일전엔 전철에 앉아 있는데 왕십리에서 대학교 2~3학년쯤 되었을 눈매가 맑은 여자애 둘이 타더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게도 잘 들렸다. "너무 잘살려고 할 필요 없잖아. 유럽식은 안 그런데, 너무 미국식으로 따라가잖아. 50~60대는 나이가 너무 들고 미국에 너무 많이 얻어먹어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저리다 못해 가려웠다.
"아냐, 50~60대도 너희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엄청 많은 나이가 아니란다. 미국에 너무 많이 얻어먹기만 한 것도 아니고. 설혹 그랬다 해도 그것 가지고 너희를 키웠고, 너희들이 이것이 낫다, 저것이 낫다 할 선택거리도 만들어 줬잖아. 그리고 우리는 요즘 상황도 잘 이해하고 있어." 이렇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오지랖은 접고 입은 다물어야 한다는 말을 거듭 되뇌며 혀를 깨물었다.
아마도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내 서러움은 이러저러하게 집 안팎에서 겪은 마음의 생채기들이 아우러진 나이 예순의 조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예순이 되면서 나는 커다랗고 비싼 도미를 구워 거침없이 혼자 먹으며 '자중자애(自重自愛)'의 뜻을 비로소 깨달았으니….
옥명희 도서출판 소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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