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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초점] 오늘 약속을 내일 뒤집는 나라

앤 셜 리 2012. 3. 14. 12:37

요즘 여야의 복지 공약은 거의 비슷해졌다. 여당이 '좌클릭'을 거듭한 결과다. 여당이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자 야당은 더 왼쪽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한·미 FTA 폐기(혹은 전면 반대) 주장이나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가 대표적이다.

이런 선택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판단하긴 이르지만, 가시화되는 징후 중 하나는 야당 지지층 중에서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왼쪽으로 가는 도가 지나쳐 중도좌파 지지층의 '심리적 안전지대'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 '집토끼' 놓친다고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야당은 '중도 실용파'의 이탈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오랜 민주당 지지자였던 한 386세대 기업인은 "한·미 FTA 폐기 주장이 야당의 득표 전략인 줄 알았는데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정권을 잡으면 실제로 할 수도 있겠더라"면서 "이런 당에 정권을 맡겨도 괜찮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한·미 FTA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한국이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 약속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세계 최대 경제 대국과 정상회담을 포함해 수십 번 회의를 하고, 국회 비준까지 한 조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나라의 기업인이 '내가 다른 사람과 맺은 계약이 지켜질까' 불안해하는 것은 그지없이 당연하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만난 한 지방자치단체장은 "유럽의 유명 회사가 우리 지역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 계약을 지금 하면 좋을지, 다음 정부에 가서 하면 좋을지 물어오더라"고 전했다. 이 정부에서 맺은 약속이 다음 정부에서 지켜질지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구심이 더 커지면 한국과 비즈니스를 하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FTA를 폐기하면 국제사회는 한국을 북한과 비슷한 나라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국가 브랜드의 손상은 민간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신용은 시장경제의 근간이다. 부도가 무서운 것은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신용을 잃기 때문이다.

이미 야당 의원들은 지난해 12월 한·미 FTA를 이행하기 위해 정부가 개정한 14개 법률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입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물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의석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 대통령의 거부권도 무력화될 수 있다.

민주통합당이 더욱더 왼쪽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정권을 잡기 위해 통합진보당과 시민단체 등 범야권 연대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처럼 89석의 민주통합당이 7석의 진보당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야권이 바라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한·미 FTA 이슈에 불을 지펴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처럼 반(反)정부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는 물론 민주당도 FTA 폐기를 약속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첫째, 한·미 FTA 폐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큰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이미 맺은 계약에 문제가 있어 상호 합의하에 수정하는 것과 약속 자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둘째, 바로 이런 이유로 누가 정권을 잡든 한·미 FTA 폐기를 실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고, 이 경우 한·미 FTA 폐기 주장 자체가 국민에 대한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약(空約)에 그칠 것이란 점이다. 많은 경제·정치 전문가는 후자의 가능성을 훨씬 더 높게 보고 있다. 어느 쪽이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점은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