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책.

니체(Nietzsche)는 이렇게 말한다

앤 셜 리 2013. 2. 21. 16:49

니체(F. Nietzsche)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평소에 가까이 하지않던 음악을 가까이 하기를 원할 때... 그 음악을 가까이 하기위해서 우리는 먼저 전체적으로 음형과 멜로디를 듣는법과, 그것을 알아차리고 구분하는 법, 그리고 그것을 독립된 생명처럼 분리해서 한계를 정해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의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아내기 위한 노력과 선의를 가져야하며, 그것의 인상과 표현에 인내심을 가져야하고 , 그것의 괴이함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기다리며, 혹은 그것이 없으면 아쉬워지게 되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가차없이 강요하고 매혹시키는 일이 계속되면서 마침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나은것을 원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을 원하는, 겸손하고 매혹된 그것의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런일은 물론 음악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든것들을 사랑하는법을 어떻게 배웠던가에도 해당된다,.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이런식으로 (사랑하는법을..)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별도의 다른길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배워야하는 것이다,.. "

이 표현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거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감정반응이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편하게 한다, 그것은 일단 위험이 없고 새로운 노력을 필요치 않는다,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며 한발 한발 조심 스러워 할 이유도 없고 그저 가던길을 편안하게 걸어가면 그만이다,

당신이 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고 생각하자,

천장에는 박귀가 날고, 눅눅하고 습기찬 공기가 피부에 와 닿으며, 발 아래는 수만년동안 가둔 무엇을 품고 있었을지 모르는 동굴연못에 시커멓고 차가운 물이 가득 고여 있고, 당신은 가슴까지 차오른 그 물을 가로질러 다시금 이어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자 그렇다면 당신이 이 소(沼)를 건너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나타날까?

당신은 이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 다음에는 과연 무엇이 잇을까?

만약 당신이 보통사람이라면 이미 그 차가운 물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생명체가 영화괴물처럼 당신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 갈까봐 혼이 나갔거나, 아니면 반대쪽에 이어진 끝을 모르는 동굴에서 수만년전의 화석 생물이 덥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고고학자라면 당신이 전인미답의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디디는 흥분에, 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생명체를 발견 할지도 모른다는 흥분에 몸을 떨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두가지 반응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는 목적성, 또 하나는 준비된 지식, 그리고 나머지는 도전정신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에 노출된다, 겉으로보기에는 그저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먹고 신문을 읽고 차를 타고, 일을하고, 퇴근길에 술잔을 기울이고 돌아와 잠을 자는 일상의 연속이다, 당신의 삶은 아무런 변화도 없고 신선함도 없으며 그저 파김치 처럼 지치고 늘어지는 무기력의 현장이다.

그러나 실제 당신은 무수히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탐험하는 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한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갈라진다, 길을가다 돌부리 하나를 차는 일도 당신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고, 늘상 지나치던 익명의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도 당신이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퍼즐이 숨어있다.

당신의 눈에 늘 그자리에 존재하는 당신의 책상도, 당신 책상위에 놓인 볼펜 한자루도, 그리고 당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조의 세포 하나하나도 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날아가는 총알을 초당 20000 프레임으로 고속촬영을 해보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듯, 당신의 몸을 저속으로 촬영해보면 당신의 얼굴의 땀구멍하나 주름하나도 놀라운 변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당신이 입사한 이래 늘 그자리에 존재 했던 책상마져도 언젠가는 사그라들어 먼지가 되어 날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내눈의 조리개가 보여주는 속도로 바라보는 사물을 전부라고 생각 할 뿐이다 ,

사람은 고작 16Hz에서 20KHz 수준의 소리와 380∼770㎚ 수준의 가시광선 밖에 볼 수 없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고작 일곱색깔의 빛을 조합해서 그것을 사물이라 생각하지만, 그나마도 그 일곱색깔의 각각의 고운 물감들을 하나로 섞어 놓으면 우리는 그것을 비추어보고 "희다"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인 지구의 자전 소리도 듣지 못하고, 개나 말이 듣는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한다,

이렇듯 동일한 사물을 두고도 우리의 인식너머 저편에 존재하는 세계는 내 생각과는 늘 다르고, 한번도 보지 못한 생소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게 보이고, 지금 내게 느껴지고, 지금 내게 들리는 그 익숙함의 포로가 되고 그것을 늘 나를 안주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익숙함,,

그것은 어쩌면 우리자신들이 모두가 맹아,농아임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면에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한 줌의 주파수에 세상의 모든 코드를 맟춰두고, 그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농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타인을 그렇게 규정하는 우리모두가 농아, 맹아 일 수도 있다.

늘 익숙한 것에 젖어 있으면 당신에게 주어진 기회도 늘 자그맣고 협소하다,

당신이 좀 더 열린 의식으로 보지 못한것을 짐작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으려고 들면 당신에게 열리는 세상도 무한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가끔 대중가수들이 노래하는 파괴적인 가사를 담은 노랫가락이 당신의 귀를 불편하게 하고, 전위예술가들의 세기말적 퍼포먼스가 심기를 사납게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당신이 보지 못한 세계를 보는 주파수를 가지고 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익숙함이라 불리는 일상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자.

왜 저들은 일상에 진절머리를 낼까?

그렇다면 이제는 반대로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첨단 디자인의 mp3 플레이어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거기에 버튼 하나를 더 붙이고,

또 누군가는 거기에 색깔만 바꾼 제품을 계속 만들어 낸다고 상상해보자, 혹은 월드컵 기간내내 3개 공중파가 하루종일 같은 방송을 해설자만 달리해서 지겹게 틀어 댄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 식상함에 질리고, 변화없이 반복되는 중계방송을 두고 언젠가는 저주를 퍼붓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전위적이거나, 혹은 진보적이거나, 혹은 일상을 벗어 난다는 것은 늘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발전의 시작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디자인은 익숙함에서 오는 피로를 벗어나는

노력이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획기적" 이라는 단어를 들어 지지를 표하지만 정작 당신의 일상은 어떠한가?

혹시 당신이라는 상품은 진부하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어떤 진화를 이루어 내고 있는가? 생물학적 연령이 축척되면서 당신에게 주어진 변화는 고작 늘어가는 흰머리와 주름이 고작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매일 거울 앞에 서 있는 당신에게서 어떤 변화의 조짐을 읽을 수 있는가? 당신의 얼굴에서 혁망가의 그것을, 예술가의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과연 당신은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익히고, 어떤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거슬리는 것들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의 인내심을 보일 수 있고, 그것을 내것으로 품으며, 종국에는 그것을 사랑 할 수 있는 관대함이 존재하는가? 당신의 당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 당신이 발을 디디고 눈으로 쳐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믿었던 세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가 과연 궁금한 사람인가?

생활의 재발견,..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제목을 넘어 바로 지금 이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명제이다,

우리는 지금 내가 늘 마주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 검토하고, 그들과의 새로운 관계속에서 흥분하고 ,우리가 일상으로 걸어다니는 거리의 변화를 재 발견 할 필요가 있다. 매일 부는 바람이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며, 보도블록 사이에 긴 이끼의 생명력이 이렇게 경이로운데, 정작 그것을 대하고 인식

할 줄아는 내가 신비롭고 자랑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늘 자랑스러운 존재여야한다,

내 안에는 항상 우주가 있고, 세상의 모든 사물은 내가 인식함으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아무리 귀한 꽃도 내가 봐주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제 아무리 비싼 보석도 내가 걸치지 않으면 하찮은 돌맹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나는 우주를 개척하는 탐험가이며, 나는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 제치는 지고지순의 존재다.

먼저 나를 그렇게 규정하고 다시 사물을 보자,

좀전까지 괴이하고, 낯설었던 것들에 대해, 굳이 내가 그것을 참아내기 위한 노력과 선의를 가지지 않고도

저절로 관대해지고. 그러면 저절로 그것에 익숙해지고, 그리머지않아 그것을 기다리며, 혹은 그것이 없으면 아쉬워지게 되는 때가 오게된다.

그 다음에 주어지는 명제는 무엇일까?

그 다음은 바로 내가 그것을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2006/08/23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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