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권과 기소권의 독점은 원초적으로 국가의 것이 아니며, 애초에 피해자의 자연권에 속한 것을 국가가 대신할 뿐이라는 역사적 기원을 상기할 때, 단순한 교통사고의 차원을 넘어 이번 참사의 초동 대처와 구조, 수습 등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가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바, 국가가 조사와 기소의 독점을 고집할 수 없는 사안이다. 조사와 기소에 대한 국가의 독점은 결코 만고불변의 절대 가치가 아니다."
법학자들의 학회 세미나 주제 발표문이 아니다. 지난 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정기회의 후 발표한 보도자료 내용이다. 이 보도자료를 읽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종교가 헌법과 법률의 옳고 그름까지 따지나?
이날 보도자료는 크게 두 가지를 다뤘다. 하나는 세월호 특별법이고, 다른 하나는 전북경찰청의 출석 요구를 받은 전주교구 원로 박창신 신부에 대한 변호였다. 정평위는 박 신부에 대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의 강론에 국가 안보 논리와 종북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넘어 사제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란 전주교구사제단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했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연말 박창신 신부의 강론 내용이 회자되었을 때 이미 언론과 정치권, 나아가 청와대의 반응들이 핵심적 내용과 맥락을 무시한 '침소봉대'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혹시 국민들이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지난 연말 박 신부의 발언을 다시 옮긴다. "일본이 독도에서 자기 땅이라고 훈련하면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쏴버려야 한다. 안 쏘면 대통령 문제 있다. 그러면 NLL(서해 북방한계선), 문제 있는 땅에서 한·미 군사운동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연평도 포격 사건이다." 이 발언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이란 말인가?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국내 보수층 일부에선 "교황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교황에 대한 섭섭함으로 치자면 이른바 진보 진영이 더했을 것이다. 명동성당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제주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쌍용차 등의 주민과 관계자들을 참석시켰음에도 교황은 단 한마디 이 사건들에 대해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정평위가 북한 인권에 대해 비판하거나 우려하는 성명이나 보도자료를 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교황 입장에서야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사안이니 함부로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천주교는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 교회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남으로 쫓겨왔고, 일부는 공산 치하에서 순교(殉敎)했다. 그들의 시복(諡福)을 준비하는 곳도 주교회의다.
물론 주교회의 안에도 여러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제 식구 감싸기'로 비치기에 충분한 일을 벌이면 주교회의, 나아가 한국 천주교 전체가 다수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 세간에는 교황 방한 이후 '냉담의 거대한 빙하가 녹고 있다'는 말이 있다. 모처럼 부는 훈풍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 것은 정말 바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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