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두 번째 경험이라 느긋할 줄 알았더니 챙길 게 한둘이 아니다. 선생님 표정은 8년 전 큰아이 입학할 때와 다름없이 근엄하다. 겁먹은 얼굴로 낯선 교실에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어서 와" 한마디만 건네주셔도 좋으련만. 아이들이 선생님께 들은 첫 훈시도 "숙제 안 해 오면 복도에 벌 세운다"였다. 어느 반 담임은 준비물을 제날짜보다 일찍 가져와도 혼을 내서 엄마들이 바짝 얼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통제 대상이고, 학교는 즐거운 배움터이기 전에 인생에서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난관이다.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어린이집에서 먼저 배운다. 무상 보육 전면 실시로 아이들이 돈벌이의 원천이 된 후로 더욱 그렇다. 영리를 추구해선 안 되는 어린이집이 창업 인기 종목에 올랐단다. 어떻게든 이문을 남기려는 원장은 교사의 월급을 깎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아동 학대와 꿀꿀이죽 사건이 한 달이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이유다. 어린이집 원장이 장사꾼이 아니라 교육자라면 법이 강제하기 전에 스스로 CCTV를 달겠다고 나서는 게 정상이다. 사설 학원과 직장 보육 시설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운영해온 CCTV를 어린이집이라고 못 달 이유가 없다.
더욱 놀라운 건 CCTV 의무 설치 법안에 반대하거나 기권한 의원 중 여성이 상당수라는 점이다. 여성부 장관에 총리까지 지낸 거물급 의원이 있고,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투쟁해온 인사도 여럿이다. 맘 놓고 아이를 맡길 보육 시설이야말로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들이라 어이가 없다.
일부 언론이 제기한 어린이집연합체의 조직적 압력에 굴복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CCTV 설치는 미봉책"에 불과하고 "정부의 관리 감독 책임을 CCTV로 돌리려는 처사"이며 "보육 교사 인권침해"라는 주장도 틀리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육 후진국인 대한민국에서 CCTV는 필요악(必要惡)이다. 의사 표현 못하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인권침해를 줄이려고 CCTV 열람도 학대 행위를 의심하는 학부모와 수사기관으로 제한했다. 반대 의원들은 "보육 교사 처우 개선이 우선"이라지만 CCTV 설치를 막을 근거는 아니다. 병행하면 된다.
CCTV에 반대한 여성 의원은 대부분 비례대표 여성 몫으로 금배지를 달고 정치에 입문했다. 이는 개인 소신만으로 표결해선 안 된다는 걸 뜻한다. 그들이 어린이집 안 간다며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떼어놓고 전전긍긍하는 엄마들의 하소연을 귀담아들었다면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을까. 불신투성이 교육 현장, 정책 수요자들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는 국회의 무능과 사욕에 진절머리가 난다.
지금도 휴대전화에선 '카톡새'가 쉴 새 없이 지저귄다. 불안과 격려와 위로의 말이 빛의 속도로 오가는 반 엄마들 채팅방이다. 문득 모성(母性)의 조직화를 상상해본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문제 아닌가. 낙선 운동, 괜한 협박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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