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철학

외부 기고문

앤 셜 리 2009. 11. 4. 13:41

초가을 이맘때면 봉정사를 찾는다. 안동에 사는 재미가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다. 요즘은 주중에는 호젓한 저녁 시간을 만들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도 토요일 오전이나 늦은 저녁 봉정사를 가면 거기에는 늘 사람대신 바람만 마당을 쓸고 다닌다.

 

인적이 없는 산사는 적요하다. 은행잎을 훝어 내린 바람이 사물(범종,법고,목어,운판)을 쓰치고 지나가며 억겁의 세월을 일깨우고 있다. 이른 아침이면 떨어진 낙엽에 제법 물기가 남아있지만 언제 태어난 것인지 모를 그 바람이 금새 습기를 말려 버린다. 바람은 그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리저리 희롱하며 보이지 않는 법(法)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산길을 걸으면 예전에는 미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드러낸다. 차를 타고 오르면 빽빽하게 하늘을 가린 소나무 숲에 눈길을 빼앗기지만, 발로 걸으면 땅에 시선이 머무는 탓이다. 걸으며 보는 것과 차를 타고 달리며 보는 것이 다른 것이다.

 

걸으며 만나는 것은 생명이다. 차곡차곡 재워진 채 꾸덕꾸덕 습기가 찬 낙엽들 사이에는 이름모를 생명들이 꿈틀거린다. 밤새 낙엽에 의지해 찬 이슬을 피하다가 본능이 이끄는대로 햋빛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차를 타고 오르면 그 생명들은 백척간두, 아슬아슬한 생사의 경계에 맞닥트린다. 아마 우리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날 때쯤 가장자리로 내려서면 아래쪽으로 작은 계곡이 보인다. 그 순간의 물소리는 다르다. 아무런 소음도 개입되지 않아서다. 소리를 듣기위해 계곡으로 몇 걸음 더 내려서서, 길가에 쪼그리고 앉으면 ‘투둑’, ‘투둑’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밤새 지탱하던 이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잎이 허리를 숙여 흘려 내리는 소리다. 물은 바닥에 떨어진 다른 나뭇잎의 등에 떨어진다.

 

나무는 가을을 준비한다. 여름내내 한껏 빨아들인 물을 몸에 담고, 광합성의 문을 닫아거는 것이다. 나무는 잎을 떼어내고, 자신을 감당하기도 벅찬 잎들은 물방울을 떨어낸다. 산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승들은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절을 떠나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고, 그때쯤 산사는 관광객들의 차지가 될 터이다.

 

이때 바람이라도 불면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 본다. ‘후두둑’ 낙엽들이 꽃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비한다. 봄이면 나무는 다시 새 잎을 내릴터이고, 그렇게 나무는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거자필반(去者必返)’. 나무와 나뭇잎, 이슬방울 하나까지 부처의 법이 스며있다. 장엄한 광경이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아래 머물지 않고서는 차마 엿볼 수 없는 광휘(光輝)다.

 

‘후두둑’ 나직한 소리지만 온 숲을 흔드는 소리다. 인간의 주파수가 아닌, 부처의 귀로 듣는 소리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떨어진 낙엽은 아쉽게 아쉽게 허공을 맴돌다 바닥에 내려 앉는다. 그것이 머물던 저 높은 나무 위가 아니라, 처음으로 바닥에 닿은 것이다. 그 느낌은 어떨까?. 먼저 앞선 동료들을 만난 반가움이 앞설까?.

 

아무리 쳐다봐도 아쉬움은 보이지 않는다. 서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대자연의 질서에 몸을 맡긴 구도자의 물색(物色)이다. 모태를 떠나 연기(緣起)의 수레바퀴에 몸을 실은 수백 수천의 낙엽이 하늘을 수놓은 장면은 아름답지만 처연하고, 장엄하지만 통쾌하다.

 

‘추락하는 것은 슬프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낙엽들은 아름답다. 질서를 거슬러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것이 인간이지만, 자연에는 역리(逆理)가 없다. 태어난 것은 스러지고, 매달린 것은 떨어진다. 하늘은 내리고 땅은 키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질서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그만큼 역리(逆理)와 배율(排律)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이 순간 내 등과 무릎에 낙엽 몇장이 내려 앉는다. 호의일까?. 적개심은 아닐 것이다. 그장면을 위해 애써 나무를 흔들지도, 떨어진 낙엽을 헤집어 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들의 군무를 ,장관을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이다. 어쩌면 증거자에 보이는 호의일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다. 나뭇잎은 생기를 잃고 노란 마분지처럼 메말랐지만, 직전까지 존재했던 생의 흔적은 감격스러운 데가 있다. 손 끝에 닿는 느낌은 차갑지도 그렇다고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막 숨이 끊어진 생명이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담담하다.

 

순간 당황한다. 내가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을 방해한 것이다. 문득 당황하며 그 나뭇잎의 정상항로를 가늠해보기 시작한다. 앞에는 이미 꽤 오래된 듯 갈색으로 변색된 은행잎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무더기를 가만히 들어 아래를 살펴보니 개미떼들이 급하게 흩어진다. 급작스러운 침입에 당황한 개미떼들이 오(俉)와 열((列)을 잊고 제 각각 산개한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개미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순간 나뭇잎을 다시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든다. 겨우 평화를 회복한 개미들에게 다시 혼란을 줄 터이기 때문이다.

 

도리없이 그대로 일어선다. 나뭇잎이 착지할 위치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공중에서 낙엽을 던지기로 했다. 엄지와 검지로 꼬리를 잡고 손가락을 비비면서 하늘에 날린다. ‘빙그르르’. 잎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가 불안정하게 낙하한다. 그리고 ‘툭’. 내가 앉아 있던 부근에 착지한다. 이것이 내가 한 개의 은행잎과 평화를 잃어버린 개미, 그리고 자연의 온전함에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敬意)이자 헌사(獻詞)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산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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