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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스크랩]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앤 셜 리 2010. 5. 29. 22:37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 대한 세 가지 고찰

막스 뮐러



1. 글머리에

다음의 생각들은 1984년 10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개최된 독일 철학회 총회에서 행한 첫 번째 공개 강연의 내용이다. 공개 강연에 이어 독일 철학회의 각 "철학 분과"에서는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라는 일반 주제로 네 개의 분과 강연을 가졌으며, 그에 이어 철저한 토론도 가졌다. 네 개의 분과 강연은 다음과 같다. 울리히 호메스(U. Hommes)의 "기쁨은 진리이다. 현대 과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루드거 호네펠더(L. Honnefelder)의 "초월적 또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하여", 얀 베크만(J. Beckmann)의 "형이상학과 비판", 그리고 헤르만 베스트호프(H. Westhoff)의 "기독교적 실존 의식 ㅡ 페터 부스트(P. Wust)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등이다. 이 강연들은 결국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가능한 네 가지의 체계적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 사유는 개별 과학에 대립되는, 초월론적 방법과 비판주의에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독특함을 대변하고 있다. 마지막의 강연은 "기독교적 철학"에 직면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독교적 철학을 "나무로 된 쇠", 즉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네 개의 분과 강연에 앞서 행한 다음의 나의 강연 내용은 위의 형이상학적 사유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2. 세 가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다음의 고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둘러싼 철학 또는 비철학 분야의 반대자들과의 논쟁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정당성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지, 형이상학의 가능한 자기 변론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은 역사적이다. 싸움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싸움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여기에서는 그때마다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근본 의도를 단순히 기술하고 묘사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그러한 의도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었는지는 없었는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들을 성찰하면서 그때마다의 형이상학은 그때마다의 자신의 자기 이해에 이를 것이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는 유럽 사상사의 흐름에서 그때마다 상이하게 파악되어 왔는데 ㅡ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유럽 밖에서는 그것과의 모든 유비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발생하지 않았던, 우선은 유럽만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ㅡ 여기서는 그러한 형이상학 행로의 세 지점이 기술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형이상학의 행로가 오늘날 어디까지 이르렀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가 자기 자신의 성찰 속에서 사유의 다른 모든 방식과 계획적으로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첫 번째 사상가는(우리는 여기서 서양 사상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형이상학을 하나의 새로운 앎으로 추구(episteme zetumene, 추구되는 새로운 앎)하였으며 동시에 그 이전에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어떤 것으로 관철시켜 나갔다.
그 다음 우리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를 찾을 수 있는 두 번째 사상가는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탐구는 인간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에서 그의 본래의 주제는 형이상학적 탐구 자체 ㅡ 그는 이것은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있다 ㅡ 도 아니며 그러한 자연 성향을 갖춘 인간(형이상학적 동물로서의 인간)도 아니다. 그에게는 삶의 형태로서의 형이상학이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형태로서의 형이상학이 ㅡ 그 이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러했던 것처럼 ㅡ 또한 학문적 인식 방법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방법은, 즉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욕구가 자신의 목표 ㅡ 따라서 학문이 되려는 목표, 즉 "학문으로 대두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ㅡ 에 도달하기 위해 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었으며, 그 길은 안전하고 확실한 학문적인 인식으로 이끌지 못하고 형이상학을 단지 끝없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길은 ㅡ 칸트에 따르면 ㅡ 서로 상반되는 형이상학의 다원성으로 인해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만들었을 뿐이다. 칸트에게도 영원히 포기될 수 없는 형이상학은 자신의 새로운 자기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길이 그에 의하여 놓아져야만 했다. 우리는 이 길을 나중에 간단히 특징지을 것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와 관련하여 논의하게 된 세 번째 사상가는 마틴 하이데거이다. 그는 처음부터 언제나 철학을 형이상학과 동일시하였으며, 일생을 통하여 시종일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마침내 오늘날 형이상학이 종말에 도달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곧 철학의 종말이었다. 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이 같은 종말은 완성(끝을 맺음)인가 아니면 끝장(파멸)인가? 서양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형이상학이 각인되어 있으며 그래서 형이상학은 서양의 역사로부터 분리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형이상학은 극복되어야할 어떤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것에 이별을 고하고 잊어버려야 하는가? 그러한 잊어버림 속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을 속시원히 떨쳐 버릴 수 있을까? 아니면 프로이트(S. Freud)가 상기시키고 있듯이 잊어버린 것이 하나의 새로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얻어 우리에게 덮쳐 오는 것은 아닐까?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를 넘어서 하이데거에서 유래된 하이데거 이후의 "현금"(Heute)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우리 시대의 형이상학은 자기 이해에 대한 물음은 ㅡ 물론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자기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도 아니고 칸트의 그것도 아니며 또 단순히 하이데거의 그것일 수 없지만 ㅡ 만일 형이상학이 실제로 서양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면(그리고 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본질 유형들과 유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 자기 이해를 정리, 작업해 내어 파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유의 첫 번째 단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로 넘어가 보자.

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오래 전(제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쿠르트 징거(K. Singer)의 저서{창시자 플라톤} (Platon der Gr nder)이 주의를 끌었다. 여기에서는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창시자로서 지칭하고 있다. 소피스트의 실증주의에 반대한 싸움에서 플라톤은 타당한 본질을 단순한 사실과 대립시켰으며, 그것만이 인식과 지속적인 자세를 가능하게 하는, 의무를 부과하며 변하지 않는 규범의 형태를 순전히 견해와 그때 그때의 적응만을 허용하는 되어 감과 대립시켰다. 이러한 서술은 옳다. 그것은 하나의 돌출 또는 징거가 말하듯이 "창시" 즉 삶의 창시이며, 여기서 삶은 사건들의 흐름에 대하여 자신을 자립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그것은 형이상학에서 감각적 자극에 대해 정신이 처음으로 의식하고 본래적으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자연의 흐름 위로 자신을 정립하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작된 것을 성찰하고 그러한 "사건"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의식의 방식을 동시에 하나의 철학 분과로 파악하려 시도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관철되었다. 그가 계획적으로 추구하고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관철시킨 새로운 앎의 방식의 자기 이해 ㅡ 이 앎의 방식이 아주 나중에야 비로소 "형이상학"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ㅡ 는 그 주제가 다음과 같이 윤곽지어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자 그 자체에 통용되는 앎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특수한 앎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적으로 모든 것에 언제나 통용되는 것, 즉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적인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가 찾은 것 또한 바로 이 점이다. 즉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자는 그 자체에서 그것이 무엇인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자체에 있어서"라는 말은 나 또는 너에게 또는 우리들의 특별한 소망, 목표, 의도와 관련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수한 "앞서 주어짐"(Vor-Gabe)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이러한 "앞서 봄"(Vor-Sicht)은 그것을 오히려 나와 우리들로부터, 그리고 나와 우리들의 주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그것을 "분리된 것", 즉 "절대적인 것"(absolut)으로 본다. 압솔베레(absolvere)는 떨어져 나옴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에 대해 비록 상관적이기는 해도 상대적인 것으로 관찰될 수 없다. 모든 시야는 하나의 관련이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내어 주는 관련"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두가 관련되는 자유롭게 내어 줌의 능력은 단지 정신, 이성, 누스(Nous)에게만 있을 뿐이다. 이 정신은 모든 것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나와 너의 이성이 아니라 어떠한 특수성과 개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 이성만이 우리들 안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을 결합시키고 있으며(활동의 이성) 또한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내주기도 한다(수용의 이성). 따라서 그 이성은 최고의 활동성과 수동성의 역설적 통일성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형이상학은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볼 때 역설적인 이성의 앎이지, 특정한 것을 사실에 맞추어 숙고하여 파악하는 오성의 앎( , ratio)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목표로 하고 있는 앎은, 한편으로는 (신과 같이) 정신 또는 이성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만 정신 이성을 "갖고 있을" 뿐인, 다시 말해 정신 이성에 참여하고 있을 뿐인 유한한 인간의 앎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유한한 존재자에 대한 앎으로서, 오직 이러한 유한한 존재자 모두에 (따라서 그 총체성에 있어서) 대한 앎이다. 그러므로 이 앎은 절대적이며 유한한 앎이다. 이 앎은 추상적 앎으로, 그 모든 앎의 단계에서 유한한 것으로 머물게 된다. 그것은 추상을 통해서, 즉 많은 것을 생략해 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 모든 것에 타당하기 위하여,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규정할 수 있기 위해 무수한 구체성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추상적 개괄은 아직 구체적인 통찰(intuitus)은 아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형이상학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묘사시키고, 제한시키는 추상적 의미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학문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절대성"은 단지 "존재자" "그 자체"와 관련되고 있는 "분리"(Absolvenz)를 뜻하고, "총체성"은 단지 외연적 . 양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괄을 뜻한다. 최후의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계 학자이며 서양의 고전 형이상학가인 헤겔(G.W.F. Hegel)은 비로소 정신의 발전사({정신 현상학})에서 순수 현실과 순수 가능의 동일성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역설적인 이성의 "공허"(이 역설은 모든 것을 덮치는 비구체적인 덮침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를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침내"(단순히 양적 . 외연적 . 추상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질적 . 내연적 . 구체적 전체 앎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까지 항상 인간의 유한성의 한계에 머물러야 했던 형이상학의 자리에 헤겔은 절대적 앎에 대한 논리학을 갖다 놓고 그것을 인간의 인간성의 극복으로, 즉 사유에서 인간성의 지양으로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지양이 신 안에서 실제로 현실적으로 일어난다고 이해했다. 우리 자신도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신성에 접근해 갈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접근은 특히 인간적 . 형이상학적 이론에서 이루어지며 이 이론은 노에시스 노에세오스( , 사유의 사유)라는 신적인 정신의 관조를 향해 간다. 그러나 이 접근의 운동은 결코 "시민 생활"(J. Ritter가 모범적으로 서술하였듯이)이라는 포기될 수 없는 토대를 떠날 수는 없고, 실천적 . 정치적 현존재(그리고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등에 대한 그의 반성)라는 토대와의 결속을 간단히 융해시켜 버릴 수 없으며, 결코 지상의 현존재를 신적인 정신의 관조 때문에 등한시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은 정치학을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는 이러한 유한성의 지양될 수 없음 속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사유가 갖는 신적인 자율성과 신적인 것에 대한 불변의 앎 그리고 이 앎에서의 신적인 현전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신적인 것은 유토피아적 미래의 기획 투사가 아니며, 그것은 여기에 있는 현실이며, 세계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그 자체로서 우리의 존재론적 앎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의 것이다. 모든 것에 해당되고 관련되는, 따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로고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모으고 있는 "이다/있다"(ist)라고 말함은 모든 것에 대해 "이다/있다"고 말하는 발언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해 똑같은 정도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다/있다"는 그 자체 결코 단지 한 가지 형태(univok)로만 통용되지 않고 그것은 그것의 명백한 유사성에서도 항상 또한 비교될 수 없는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다. "Ist"에 있어서의 이 둘의 결합을, 즉 그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차이와 동일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라고 불렀다. "이다/있다라 말함"은 "유비적인 말함"( )이다. 거기에서는 의미 깊은 다의성이 지배적이다. 다의성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비슷한 방식으로 고찰하는 존재론의 "이다/있다"에는 항상 더 또는 적게 "있다"는 차이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이 함께 의미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있다"는 감각적인 제약 속에서 만나질 수 있는 것의 그 자리에 있음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현전성 존재와 의미의 가능하고 현실적인 모든 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으로 있다"의 무엇은 형상으로서의 본질, 바라볼 수 있는 고정된 윤곽으로서의 본질, 봄(바라봄)에서 항상 이미 보아진 것으로 남아 있는 규범적인 원초 현상으로서의 본질을 의미할 뿐 아니라, 형상 중의 형상, 그 자체 형태가 없는 그러한 "형상 중의 형상"까지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이온( , 신성)처럼 플라톤의 아가톤( , 좋음)도 척도란 없으며 그러기에 척도가 된다. 그것의 실제의 현재는 모든 것이 그 존재성에서 이 척도에 재어져서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으로 놓이게끔 한다. 이러한 척도는 "나타나거"나 "생각되거"나 "들을 수 있는"(노에인 [ ]은 듣는다는 의미가 있다)데 이성으로서의 정신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이 최고의 척도를 척도로 받아들인다.
이 척도는 최고 존재자이며, 이 존재자는 그 자체 더 이상 어떤 다른 척도 아래에도 놓여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최고의 존재자(Summum ens)로서 그 자체가 척도이며,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자에게 척도를 제시하며 앞서가고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신적인 것과의 연결 속에서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인 "이다/있다라고 말함"이 참으로 "발언"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만 "이다/있다"의 발언이 모든 단순한 형식을 넘어서 내용적인 것, 즉 충만되고 가득 찬 것이 된다. 존재의 발언(Ist-Aussage)은 그것의 형식적 공허에서 해방된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존재자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존재론은 무차별한(중립적인) 권태에서 자유롭게 된다.
신학과 신적인 것에 대한 로고스와의 연결 속에서 비로소 무차별한 "모든 것"이 구별된 "우주"가 된다. 척도가 되는 존재자와의 구별에서 드러나고 있는 존재 안에서의 이러한 등급이 비로소 추상적 . 절대적 존재론을 위계 질서적인 형이상학으로 만든다. "위계 질서적"이라 함은 개개의 존재자가 모두 "바로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 된다. 등급은 바로 이 자체 존재를 구성하는 참으로 절대적인 규정이다. 자시 말해 척도가 되는 것에 대한 학설(신학)과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즉 자체 존재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설(존재론, 이 칭호는 후대의 것이며 17세기 두이스부르크 대학 교수인 클라우베르크가 처음 사용하였지만, 그 사실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은 둘 다 내면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 보편적 . 절대적 고찰이 이 고찰에 내재적인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 위계 질서적인 신학과의 이 내면적인 동일성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래하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과 세속화된 형태의 근세의 지류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등급에 대함 물음이 갖는 결정적인 역할은 ㅡ 뷔르츠부르크(W rzburg)의 하인리히 롬바흐(H. Rombach) 교수는 1983년 예술 사학자인 마르틴 고제브르흐(M. Gosebruch)를 위한 논문집에서 이에 관해 결정적인 것을 서술하고 있다 ㅡ 여태까지의 통상적인 학술 견해와는 다르게 다음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최고의 존재로서의 신을 표본으로, 모든 세계 내의 유한한 존재자의 척도로 제시하고 있는 토마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에서의 네 번째인 신에 이르는 길은 내용적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게로만 소급되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인 사상에서 신적인 척도가 항상 이미 현존하는 근본 바탕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로서 그리스도교적 창조 형이상학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그 모든 인과적 움직임에서부터의 증명들보다 앞서 있다. 그리고 네 번째 것은 본래 첫 번째 자리에 놓았어야 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이해에서 신적인 것의 목적론적 증명 제시는 모든 원천의 증명에 앞선 모든 운동의 과정이자 동시에 최종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한, 후에 "제 1철학"이라 칭한 형이상학에 대한 다른 규정들은 여기서 우리가 설명한 자기 이해에 아무런 문제없이 끼워 넣어질 수 있다. 예컨대 자연학에 대한 구별 같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세계 내에서의 되어 감과 되어 감의 운동들을 (변화, 예를 들어 와 로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형이상학은 존재를 현실태와 현실 이행으로서, 그렇게 되어 있음과 존재해 왔음( )으로서 견지해 왔다. 존재자가 지금 여기에 있기 위해서, 항상 이미 거기에 존재해야 하는 어떤 것을 견지하고 있다. 또는 논리학을 "도구"(Organon)라 구별해서 규정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이 논리학은 올바르지 않고 틀릴 수도 있는 말함과 판단함의 올바름에 관여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자기 이해의 유명한 표현에서 얘기되고 있듯이 존재자 자체의 진리를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이 진리가 모든 것에 통용되는 개방성으로서 이렇게 이미 드러나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말함을 가능하게 한다.
형이상학을 모든 존재자 그리고 동시에 최고의 존재자라는 척도에 대한 보편적 . 절대적인 앎이라 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이해를 하이데거는(이로써 고전 형이상학의 현대적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제한시키며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적으로 "지양"하고 있다) 존재적이라 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개별의 존재자들을 넘어서 존재자 전체에로 향한, 그리고 그 범위 내에서 본질과 존재성을 보는 시야 역시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자의 "모든 것"과 최고의 존재자, 즉 신에 분리될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이 두 가지("모든" 것과 "신")가 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점이며, 존재론적 . 신학적 형이상학이라는 고전적 형태가 다루는 본래적인 주제로 남아 있다. 그들에게 서로 서로를 위한 공간을, 그들의 세계 구성을 위한 공간을 주고 있는 것이, 즉 존재 자체(와 그의 시간 자체)가 더 이상 논구되지 않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이라는 용어로 특징짓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유형의 형이상학(그의 삶의 말미에는 종종 모든 형이상학)이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 제시해 보인다. 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 유형을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4. 칸트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

우리는 이제 유럽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그 다음의 커다란 단계로서 칸트의 사상을 간단히 소개하도록 하자. 그의 사상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그 이전의 모든 형이상학 이해와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있다.
칸트에게서 "형이상학"이 포기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비판 이전의 "교의적" 칸트, 따라서 그의 첫 번째 비판인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출간된 해인 1781년 이전의 칸트에게 통용될 뿐 아니라 또한 "비판적" 칸트에게도, 따라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근거 제시된 초월 철학의 칸트에게도 통용된다. 그의 부정은 형이상학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전수된 학문의 형태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학문의 형태로서는 형이상학의 정당성과 확실성이 변론될 수 없다. 칸트에서 형이상학이 포기될 수 없음은 형이상학 자체에서 유래한다.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을 단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한 번도 문제로서 지기하지 않은 점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아마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물음이 제기된 것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뿐이다.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물음들에 대해 형이상학이 추구해야 하는(그렇지 않을 경우 물음이라는 의미가 없다) 대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앎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앎이 의식과 연관 속에 서 있을 때만 ㅡ 앎은 이 연관 내에서 자신의 타당함을 변론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확실한 것이 된다 ㅡ 앎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에 대한 변론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확실성을 변론해야 하는 학문성이 여태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에는 전혀 비판적으로 시도도 되지 않았거나 또는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에 대한 외적인 징표를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 상호간의 해결 될 수 없는 논쟁에서 보고 있다.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소위 앎의 체계라고 하는 것의 합법성과 비합법성을 위한 명백한 기준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 합법화가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형이상학이(그것의 총체적 . 절대적 . 보편적 .선험적 성격에 있어) 인간의 유한성과 어떤 모순 관계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이상학이 처음부터 모든 것에 대한 어떤 규정을 바라고 경험되어야 할 개개의 것들의 구조 ㅡ 이 구조는 경험에 앞서 이미 알려져 있고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 ㅡ 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또한 어떠한 유한자도 경험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해 명백한 확실성이 주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 ㅡ 이러한 요청들이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요구해 온 것들인데 형이상학은 그 요청들을 채울 수 없고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
1785년에 나온 {학문으로서 대두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Prolegomena zu einer jeden k 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 nnen)은 이렇게 칸트의 이론적인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를 윤곽 짓고 있다. 이 형이상학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의심들을 씻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형이상학인가? 이 형이상학은 모든 것이 개별적으로 경험되기 이전에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자(Transzendenz)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초월성(Transzendentalit t)에, 즉 나에게 대상으로서, 객체로서 맞은 편에 서 있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의 가능 조건들로의 소급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자체에 있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관심거리가 아니다. 나에게서 분리되어서는 또 우리와의 접촉이 없이는 그 어떤 것이란 어둠 속에 놓여 있고,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경험적 세계 밖에 있으며, 따라서 인식 불가능하다.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리와의 접촉 ㅡ 칸트에 따르면 이 접촉은 오직 감각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ㅡ 은 감정 촉발이다. 우리의 그것과의 접촉은 객체화, 대상화라 불린다. 이 둘의 공동역할(즉 감정 촉발의 대상화)이 비로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데, 경험 가능한 것의 총체성을 자연이라 부른다. 그래서 경험과 관련하여 칸트는 "자연과 가능한 경험은 완전히 하나이다"({프롤레고메나}, 36정)고 하였다. "선험적 종합 판단"(즉 "자연"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판단)에 대한 최상의 근본 명제는 "경험의 가능 조건은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 조건이다"는 것이다.({순수 이성 비판}, B. 197). 이 문장은 전혀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는데, 그 까닭은 경험의 대상들, 따라서 경험 가능성에서 경험 가능함 그 자체는 경험하는 주체의 경험할 수 있음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고전적 . 존재론적 형이상학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자기 이해에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자연(Physis)은 이제 더 이상 그 자체에서 생성되는 것(Phyein=Wachsen) 또는 스스로에서 자라 나오는 것 ㅡ 이 속에 자연 존재로서의 우리들도 포함된다 ㅡ 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것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자연은 이제 감각적 지각을 연구하는 자연 과학의 상관 개념으로 이해되며, 이 자연 과학은 일차적으로 뉴턴의 고전적 물리학이다. 이 물리학이 유일하게 가능한 학문적 물리학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의 근본 바탕이 곧 자연 형이상학의 주제이다. 경험 가능성, 대상성, 대상화에 의해 적용 받는 객관성과 현상성 등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들의 전체에 대한 선험적인 파악은 초월자를 앞서 잡거나 덮쳐 잡지 않고도 파악되며 그래서 그것은 주체성에 앞서 놓여 있는 가능 조건들로의 소급에서 확실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그가 계획한 자연의 초월(론적) 형이상학(이것은 실제에서 단지 자연 과학들이 형이상학일 뿐이다)에 관해서 대단히 낙관적이다. 개별 자연 과학들이 무한히 진보, 발전할 수 있고 확대되어 나가기 때문에 경험의 무제한성 속에서 완성될 수 없는 반면 자연의 초월(론적) 형이상학(Transzendentalmetaphysik der Natur)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순수 이성 비판}(A XX)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즉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는 개념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이제 모든 과학들 중에 유일한 학문으로서 그러한 완성을, 그것도 짧은 시간에 그리고 적은 일치된 노력으로서도 약속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후대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한 체계는 그 폭에서 반도 못 미쳤지만 여기 이 비판보다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그것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유고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따라서 칸트는 자기의 형이상학 ㅡ 그에게서는 모든 것이 이것을 향해 흘러 들어오고 있다 ㅡ을 주체성으로의 초월론적인 소급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초개별적이고 초경험적인 주체성은 그 안에 대상적 관련에서의 대상적 가능 조건들을, 따라서 자연 과학의 대상들로서 모든 경험 가능한 대상들의 단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자연 형이상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자연 과학 및 그것의 상관 개념인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이 되어 버렸고, 앞서 잡음과 초월(Transcensus)은 거슬러 올라감 즉 소급이 되어 버렸고, 존재자의 존재성의 자리에 대상들의 대상성이 들어섰고, 존재 및 자체 존재의 진리는 주관적 가능 조건들에서의 대상적 관련들에 대한 경험의 확실성과 올바름이 되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앎의 선험성과 그것의 보편적 총체성인데, 그것도 이제는 감각적 경험과 현상에 제한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상승된 것은 확실성의 정도와 초월성과 보편성의 근거에 대한 통찰이다. 이러한 자기 이해의 협소함과 거기서 이해되고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들은 우리들 논의의 마지막 단원인 다음 단원에서 소개될 것이다.
이러한 초월론적 . 현상적 자연 형이상학은 칸트의 전체 형이상학이 아니며 그의 본래적이고 핵심적인 형이상학은 더더구나 아니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 형이상학"이 그것에게 자리를 비워 주어야 하는 본래적이고 결정적인 형이상학은 {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이다. {프롤레고메나}가 자연 형이상학의 계획을 초안했듯이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der Metaphysik der Sitten)는 도덕 형이상학의 윤곽을 초안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 형이상학 옆에 자유 형이상학이 등장하며 그것의 칭호인 "도덕 형이상학"은 본래 "도덕성의 형이상학"이라 불러야 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도덕 자체가 경험적인 현상으로서 초월론적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론적 도덕성에서 경험적 도덕으로 옮아감이 거의 간과되고 있다. 그 까닭은 여기서는 아무런 대상성도 없고, 경험적 도덕을 위한 어떠한 객관적 구조도 선험적으로 유추해 낼 수 없으며, "도식화"를 통해 중재하여 적용시킬 수도 없고, 오직 자유가 양심에서 스스로 절대적 . 사실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직접 경험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절대적 요청 아래에서만 비로소 자유로서 경험되며, 무조건적인 것에 대해 요구된 결단으로서 경험된다. 개개인은 모두 이 자유 앞으로 내세워지게 되고 아무도 그것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에게, 또 어떠한 상황에서도 통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형식적으로 보편적이고 항상 타당한 내용이 없는 "준칙"들로 표현될 구 있다. 정언적 명령은 자신의 내용 없음 속에서 범주적(kategorisch)일 수 있는 바로 그 때문에 정언적(kategorisch)이다. 행위하는 자에게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만 그 절대적 확실성 속에서 어떠한 내용적인 진리나 올바름도 그것 (정언적 명령)에서 사라진다. 오직 가능한 단적인 보편화만이 (개개인이 모두 내 처지에서 서게 되면 똑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단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보장할 뿐이다.
자유 형이상학은 자연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내용이 없으며 비대상적이고 순수 형식적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객체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초월론적 자연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자유 형이상학은 무상관적으로, 다시 말해 여기서는 "본체론적으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초월론저인 주체로부터 발생되지 않고, 초월론적 . 경험적 주체성을 향해 발생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체가 객체를 구성하지 않고 그 자체가 주체로서 초객체적인 것, 초현상적인 것 자체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고전적 . 형이상학적 의미로서 "그 자체로서의 그 자체를" 뜻한다. 자립적이고 신적인 정신과의 관련에서 그 자체인 참된 존재자에 대한 형이상학은, 무조건적인 규율과의 관련에서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자유 형이상학에 의해 해체된다. 그로써 어떤 새로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윤리적인 것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날 뿐이다.


5.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자기이해

이제 우리 고찰의 마지막으로 현대의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자기이해의 마지막 단계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형이상학 이해를 다루고자 한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하이데거는 일생동안 철학을 단적으로 형이상학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형이상학과 결별해야 한다고 믿었을 때 그는 동시에 철학에서도 떠났다. 그는 사유하는 "회상"으로서의 "존재의 사유"에서 사유의 한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이 사유는 자신의 독특한 엄밀함을 가져야 하며, 또한 동시에 철학과 개별과학의 저편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그때까지는 자신을 형이상학자로 이해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에서부터 떠나면서도 자신을 형이상학자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출간된 책들에서 어느 정도 이미 드러나고 있다. 1929년 그의 유명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취임 강연 제목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였다. 제 2차대전 직후 쓰여졌고,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그 강연의 머리말은 프랑스어로 "La remont e au fondment de la metaphysique(형이상학의 밑바탕에로 소급해 감)"이라 되어 있다. 이 말은,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모든 절차는 그 밑바탕에로의 소급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여기서의 밑바탕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더 이상 초월론적 해석으로서나 실존론적 해석으로서도 주체성이 될 수가 없다. 86세의 사상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즉 1975년에 이 책자의 제 11판이 발간되었다. 그는 1975년 10월에 견본 하나를 다음과 같은 글귀로 증정하면서 나에게 보냈다. "새로운 것은 없다. 그렇지만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 막스 뮐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인사드린다.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따라서 "1975년에도 형이상학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수 많은 형이상학 강의들 중에서 그는 니마이어(Niemeyer) 출판사에서 {형이상학 입문}을 출판했다.(1953) 전집 출판에서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이 발간되었다. 이 책을 그는 70년대의 오이겐 휭크(Eugen Fink)에게 헌정했고 그를 위해 보탬말을 썼다. 이미 그 전(1929)에 그의 핵심이 되는 철학-역사적 논문은 구성 양식상으로는 아마도 위대한 작품일 것이다. 즉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가 그 책이다. 이 책의 증보판인 제 4판의 견본을 1973년 하이데거는 나에게 또 한번 "진심으로 감사하며 인사드린다"라는 글귀와 함께 보내왔다. 하이데거, 그는 결코 형이상학적 전통을 떠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이것은 모든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넘어서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 원함을 주관적인 자기의 원함으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이 표현했듯이, "역운", 즉 역사적인 과업, 그가 좇아야 할 "소명"으로 느꼈다. 한 젊은 고등학생으로서의 그가 이미 어떻게 이 역사적인 과업을 느꼈는지를 그는 자주 묘사했고 기술했다.
(1) 후에 프라이부르크 대주교가 된 콘라드 그뢰버(Conrad Gr ber)는 콘스탄츠시 주임신부로서, 그 곳의 국립 고등학교를 다니는 젊은 메스키르히 고향사람에게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저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를 선물로 주었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그 자신에게 결정적인 이정표였다고 말한다. "좁은 의미의 사상가(사유자)는 많은 사상들을 갖고 있지 않고 끊임없이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깊이 사유한다"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가 일생동안 깊이 사유해온 이 하나의 사상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단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예외없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이다/있다'라는 말함 속에서 그 '이다'(있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모든 것을 단적으로 '이다/있다' 안에서 상이하게 함께 끌어들이고 있는 이 신비스러운, 유비적인 동일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므로 존재론은 바로 그의 실존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존재론인가?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 삶의 과업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형이상학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내려지고 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 자체와 존재자 전체를 거슬러 올라가서 탐구하기 위하여, 존재자를 넘어서서 캐묻는 물음이다."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서" 거기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취임 강연에서 말하기를, "아무 것도 없다" 또는 "무"(das Nichts)가 있다. 무와 존재, 이것들은 비록 "주어지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자로서는 없는 것이지만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는 있다는 말이다. 헤겔은 이미 그의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무엇을 갖고 철학을 시작해야만 하는가?").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 무와 존재에로 들어서는 이 넘어섬을 하이데거는 "초월(Transzendenz)"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시도로서 넘어섬의 사건을 뜻한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 있어서의 근본사건이며,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현존재", 이것을 그는 "세계-내-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점점 더 강하게 되어가는 그의 사상의 "역사화" 속에서 차츰 차츰 하나뿐인 세계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세계들이라는, 역사적 세계들이라는 다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존재이해가 이제는 여러 다른 세계들에서의 "'이다/있다'라고 말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세계역사들의 이 역사성이 하이데거의 자기이해에 있어 부분적으로 열려 있고 부분적으로는 감춰진 채 남아있는 문제가 되는데, 이 문제에서부터 하이데거 사유의 실존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가 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문제가 그를 찾은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을 나중에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2) 나는 여기서 사유에 있어서의 그의 길을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몇몇 외적인 이정표만을 암시하려 한다.
ⓐ 그의 본래적인 계획 - 교수임용 자격논문 작성 때까지만해도 - 은 신학자들에게나 비신학자들에게도 똑같이 철학함을 중재할 수 있는 그러한 철학 교수직의 주임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즉 나중에 소위 "국가와 교회를 위한 교수"라는 교수직을 얻기위한 것이었다. 이 의도는 1919년에 완전히 포기되었다.
1919년 1월 9일자의 카톨릭 교의학 교수 크렙스(Engelbert Krebs)에게 - 이 사람이 하이데거의 계획을 그때까지 결정적으로 북돋아 주었었다 -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역사적 인식의 이론까지를 포용하는 인식이론적인 통찰들이 나로 하여금 카톨릭주의의 체계를(손으로 쓴 Text에서 이 점을 밑줄로 강조하고 있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 주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상과 형이상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물론 이것들은 새로운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1)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자기이해와 관련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여기서 그는 "카톨릭주의"를 "체계"라고 파악했다. 이 예전의 형이상학은 신스콜라학파의 형이상학을 말하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교의학은 또한 그 형이상학에 의해서 상호간의 제한 규정 속에 근거지워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이미 그리스도 사상은 당시 교회의 견해와는 다르게 결코 체계가 아니며 역사이다. "인간과 더불어 신의 역사 그리고 신과 더불은 인간의 역사, 역사학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하나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형이상학(Geschichtsmetaphysik)의 사건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둘(즉 새로운 종교성과 새로운 형이상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 순간(즉 1919년) 열려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자로서 머물러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자로서도 그는 이제부터 그 발자취가 메타역사학자이다. 나는 여기에서 새로 시작된 포기될 수 없는 형이상학의 방식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하이데거 자신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인간의 안간성에 속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형이상학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미 항상 형이상학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말하기를(Phaidros 279a)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건 철학함이, 즉 형이상학이 일어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결코 번복하지 않았다.
(3) 하이데거의 사상전개와 자기이해에 있어서 두 가지 과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방향을 정한 고전적 형이상학을 통한 과정이고, 다른 것은 후설에 의해 창시된 현상학을 통한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후설은 같은 방식으로 그의 스승인 셈이다. "과정(Durchg nge)"이라는 이 말은 하이데거 자신이 택한 말이다. 예수회의 리챠드슨(P. William J. Richardson)이 그의 방대한 하이데거 책 "Through Phenomenology to Thought(현상학을 통해서 존재의 사유에로)"를 하이데거에게 보내어, 그 책에 삽입할 아름다운 시 "라이헨아우에서의 저녁 산책"을 부탁하면서 편지를 띄웠을 때, 하이데거는 제목을 정하는 데 있어 고집을 세우기를, 제목에 원래 "--에서 --에로"라고 되었던 것을 "--을 통해서"로 바꾸기를 주장하였다. 이 말은 그가 그의 자기이해에 있어 현상학도 형이상학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뜻하며, 그것이 하나의 같은 길이며, 이 길은 그 둘을 통과해서 하이데거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고, 그 자신도 결코 그 길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길에 머물러 그 길을 자신의 길로서 간직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같은 길을 계속 걸어갔다.
(4) 이 길 위에서의 계속된 걸음은 우선 하이데거를 두 가지 부정에로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번째 부정은 현상학의 바탕에서 칸트와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에 대해 내리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이중의 뜻이 있다. 이 비판은 우선 칸트의 이론적 초월형이상학(즉 자연형이상학)에로 향하고 있다. 이 형이상학의 밑바탕에는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협소한 경험개념이 깔려 있다. 경험은 여기서 항상 감정촉발에 근거한 감각적 경험일 뿐이다. 즉 충동에 대한 저항의 경험이다. 반면 경험의 풍부함에 대한 전체 맥락, 즉 예술적, 정치적, 정서적, 존재론적 경험이 형이상학의 바탕으로서 도입되어야 하고, 거기에서부터 이제는 자연대상들의 경험가능 조건들만이 연역되지 말고 오히려 역사적 세계 자체의 가능조건들이 다시 경험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칸트의 자유형이상학에도 너무 협소한 자유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유가 여기서는 윤리적인 자율성, 도덕적인 결단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자유가 그 전체의 폭에 있어서 고찰될 때, 비로소 - 즉 다원적인 "창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존재자를 자유롭게 내어주는 것으로서의 "내맡김(Gelasseneheit)"과 모든 재촉에서의 해방까지를 포함해서 - 역사적 자유형이상학이 가능해진다. 이 형이상학은 책임지우는 규율을 무조건적인 자유의 규범이라고 도덕적으로 볼 뿐 아니라 또한 역사적으로 그리고 모든 영역에 있어서(따라서 윤리적인 영역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 예술적 영역까지도) 다양해야만 하는 관여함(sich-Einlassen)의 가능조건들을 이해하면서 사유할 수 있다.
고전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신론 - 이것은 존재자를 그것 자체에로 자유롭게 내어주는 내맡김(단순한 대상적인 대상화 대신에)을 알고 있다 - 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존재망각"이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거기서부터 자신의 "존재사유"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하이데거가 출발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물음의 방향은 모든 유한한 존재자와 신적인 존재자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들이 결합되어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물음의 일어남의 공간(그리고 일어남의 시간) 자체는 분명한 것으로 눈 앞에 파악될 수 없다. 존재, 시간, 세계 등은 존재자들이 아니며 그러기에 세계내부적 시간적 존재자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이것이 "전향"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 존재, 세계등이 "그 자체"에서 이해된 뒤에 시간, 존재, 세계들에서부터 비로소 눈길이 존재자들에로 향해야만 한다. 인식이란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들 자체는 그들의 진리를, "예전"의 형이상학을 극복함에서 사유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어 준비해야 하는 그 이해 속에 갖고 있다. 우리는 시간, 존재, 세계 등을 존재자가 아닌 것으로,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그 자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이해에서, 이 존재이해가 "존재자처럼"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어지고 있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 이해될 때, 즉 그 존재이해에서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존재자를 인식하게끔 해준다는 것이 이해될 때 존재는 그 자체에 있어 이해되는 것이다.
(5) 존재, 시간, 세계와 같은 것은, 그 안에 이미 들어서 있음 및 그것들과 친숙해 있음과 더불어 구별과 거리, 일정한 "물러섬"이 따를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세계들과 다른 시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이해와 더불어 생성되는 것이지, 어떤 필연적인 순서 속에, 계속적이거나 변증법적인 "전개" 속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의 출생은 각기 다른 운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운명은 그들에게 나름대로의 새로운 자유에서 떠맡을 것을 호소한다. 존재, 시간, 그리고 그것들의 내어줌, 그때그때의 세계 등등은 존재하는(sind) 것이 아니고,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듯이, "주어지고 있는"(es gibt) 것인데, 이 말은 그것들 안에서 역사적으로 개개의 존재자는 모두 나름대로 다른 존재자이며, 그것들 안에서 시간은 나름대로 다른 역사적인 시간으로서 개방되고 있다는 것을, 존재는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다른 형태로 결단하도록 자신을 내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잊혀진 "주어지고 있다(es gibt)"가 비로소 이것 또는 저것으로 하여금 각기 다른 존재의 의미로 존재하게끔 해 준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단초를 잡기는 했지만 유럽 이외의 세계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서양의 존재이해의 커다란 시대들을 구별지어 처음으로 메타역사학적인 기술을 시도했다. 이 "내어줌(Geben)"과 "주어지는 것(Gaben)"이 다시 기억(an-gedacht)된다 해도, "Es(그것)"는 아직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다. 이 사유되어야 할 "Es"는 원칙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신비이며, 이것은 바로 그 자신의 파악될 수 없음 속에서 잊혀짐을 벗어나서 신비로서 보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비로소 모든 존재자의, 유한한 존재자의 아니 유한한 존재자 그 이상이 나름대로 다르게 "등장"할 수 있다. 즉 사물들의, 인간들의, 신들의 등장,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간공간 및 나름대로의 다른 존재의미를 통해서 "Es"의 신비가 드러나고 있다. 즉 "Es"는 감추어져 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6) 이 모든 것("주어지고 있다[es gibt]"라는 사건)이 역사다. 역사 또한 존재자가 아니며, 역사 그 자체는 자신의 근거들에서부터는 자신의 참된 존재가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대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들 속에서 명백하게 파악될 수 없고 연역적으로 그것의 가능 조건에 있어 확실하게 파악될 수 없다. 역사는 "이해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것의 방법은 해석학이다. 그 시대 그 시대의 세계내부적인 역사가 있고 그것과 더불어 세계내부적인 해석학이 있다. 해석학의 방법적인 출현과 관련하여 우리는 19세기에서는 쉴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뵈크(Boech), 드로이젠(Droysen), 딜타이(Dilthey) 등을 그리고 20세기에서는 요아킴 바하(Joachim Wach),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등을 들 수 있다. 역사 또는 세계내에서의 역사들 외에도 다양하고 나름대로의 다른 "존재의 떠오름"과 "존재의 짐"으로서의, 또는 의미이해인 존재이해의 출생과 죽음으로서의 역사 자체, 아니 차라리 세계들의 여러 역사들이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견해는 명백하지 않은 "존재의 역사"에 대한 그의 "미래적인" 사유의 자기이해에 있어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이해와 세계이해를 다른 것과 구별지어 파악해야 하는 그러한 해석학에로 넘어가는 듯이 보인다. 개개의 커다란 시대와 세계의 "있음"(ist)은 모든 것을 의미하며 개개의 다른 "여기"와 "저기"를 뜻한다. 끊임없이 번역과 전수의 전이가 필연적이다. 이해는 여기에서 언제나 "유비적"이다. 그런데 예전의 표현양식을 빌어 낯설은 것 속에로의 감정이입에 있어서도 해석과 의미부여에 있어서의 불합치를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차이는 항상 동일성에 비해 더 큰 것으로 존립해 있고, 유비적인 이해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낯설음이 더 지배적이고 결코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Quanto maior similtudo tanto maior dissimilitudo(유사함이 크면 클수록 또한 그 만큼 차이점도 크다)"라고 1215년의 라테란 공의회는 신학적인 형이상학의 표현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자신에로 되던져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독특한 동일성은 다른 것과의 경계를 의식하고 이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이해된다. 이제 비로소 역사적인 자기이해가 힘을 펴기 시작한다.
칼 라너(Karl Rahner)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있은 80회 생일 축하식에서 가진 마지막 강연에서 그의 스승 에리히 프르치바라(Erich Przywara)의 유비이론이 자신의 "신비의 신학"의 본래적인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전(全) 유비이론은 "존재의 유비"를 1500년 동안을 통한 분배의, 배당의, 비례의 유비로서 더 날카롭게 전개시켰다. 그러나 칼 라너는 "역사적 유비"와 그에 속하는 개념을 아직까지 우리에게 정리작업해 주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 역시 못하고 있다. 그는 현대 "인간의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우리의 시대에 맞는 형태로서 그러한 "메타역사학"에 아주 가깝게 이끌고 왔다. 그는 범주적 개념과 실존론적 개념을 구별하면서 이 메타역사학을 준비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몇몇 근본 낱말들(예컨대 "사건")을 찾아냈으며, 그로써 우리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못했다. 이 가야할 길의 방향은 참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존재론 및 이 존재자 전체가 자기를 계시하는 신적인 것으로서의 최고 존재자에 대해 갖는 관계의 존재론으로서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에서 출발하여, 자연현실에 대한 그리고 윤리적 자유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판단들의 정당성의 가능조건들을 확실히 해야 하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중간지점을 거쳐, 세계 역사적 해석학의 메타역사학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뻗치고 있다. 참된 것의 앎(고전적 형이상학)에서부터 인식과 행위에 있어 정당한 것으로 변론된 확실성(초월철학의 형이상학)을 거쳐 역사적 진리의 유비적 이해(역사학)에 이르기 까지의 길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형이상학은 오늘날 자신의 자기이해를 찾아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7)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결국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 오직 세 가지 원칙적으로 상이한 문제제기의 방식들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을 거쳐 헤겔의 세속화된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의 주제와 그것의 연속을 "존재와 정신"이라는 표제어로 부를 수 있다. 칸트에 의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에로의 결정적인 변형은 "객관성과 주관성" 또는 "대상성과 주체성"이라는 핵심 주제로 특징지울 수 있다. 하이데거와 그 후의 현상학적으로 규정된 오늘날의(현상학 이후의) 형이상학은, 만일 그것이 자기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메타역사학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의 과제는 (역사학적) "의미와 (역사적) 자유"의 해석에서 찾아져야 한다. 메타역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의미형이상학(Sinnmetaphysik)이며 자유형이상학이다. 존재와 정신, 객관성과 주관성, 의미와 자유의 이 세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현대에서 자기자신을 서양의 형이상학 사상에서부터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사는 진보의 의미로서도 또 퇴보의 의미로서도 "전개"가 아니며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역사"이다
물음은 아직 남아있다. 이러한 마지막 해석과 더불어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적중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이해되었는가? 이것은 대답 안 된 채 남아있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이해함과 이해 못함이 아주 가까이 서로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불충분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해석의, 모든 해석학의 유비성에 근거하고 있다. 또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은 "나 막스 뮐러가 그의, 즉 하이데거의 길을 나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고 나의 길을 그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2) 이것은 물론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비록 두 길이 같은 길들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원함의 내용에서가 아니고 그 방향에 있어서의 동일성은 있을 것이다. 동일성은 주장하는 존재들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의 움직임의 방향이 일치해 있는 데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방향이 오늘날의 많은 철학하는 "동반자"와 "동시대인들"의 형이상학적 원함의 자기이해에 대해 대변적인 형태로 그 일치를 가능케 하고 있을 것이다.


* 각 주 *

1. 참조 B. Casper, "Martin Heidegger und die Theologische Fakult t Freiburg 1909 - 1923", in: Freiburger Di zesan-Archiv, 100.Bd.(1980) 534 -541.
2) 천재적인 스승과 모방하는 제자와의 거리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이 말을 한다.

* 이 글은 막스 뮐러의 글 "Was ist Metaphysik - heute? Drei Betrachtungen zu ihrem Selbstverst ndnis"(in: Philosophisches Jahrbuch 92 [1985], 52 - 67)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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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은 전부 다음 카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http://cafe.daum.net/eea)에서 협찬 받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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