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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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영감과 이중섭

앤 셜 리 2016. 6. 21. 21:23

어제 덕수궁으로 이중섭을 보러 가면서 '맥 영감'을 떠올렸다. 1950년대 대구 미국문화원장을 지내며 이중섭의 은지화(銀紙?)를 석 점 사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던 고(故) 아서 J 맥타가트 박사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위해 MoMA의 그 은지화들이 60년 만에 바다를 건너왔다.

▶맥 영감을 만난 것은 1985년 대구 영남대 캠퍼스에서였다. 공직에서 은퇴한 지 오랜 맥 영감은 고희에도 젊은이들에게 영어 회화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택시를 타지 않고 낡은 양복을 꿰매 입으면서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있었다. 대구 시민들은 그를 '맥 영감' '맥 선생'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인터뷰 중에 이중섭 얘기가 나왔다.

▶"1955년 이중섭씨가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개인전을 하는데 어디서 본 듯한 소 그림이 많았어요. 무심결에 '참 스페인의 투우만큼 힘차군요' 했더니 곁에 있던 이씨가 들었나 봐요. 당장 벽에 걸린 소 그림 몇을 떼어내 팽개치면서 '이건 스페인 소가 아니고 한국의 소란 말이오' 소리치고 나가버리는 거였어요.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싶었지요." 사실 맥 영감은 이중섭이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 맨 먼저 알아본 서양인이었다. 그는 MoMA에 보낸 것 말고도 이중섭 그림을 몇 점 더 샀는데 나중에 이걸 팔아 장학 사업의 종잣돈을 삼았다고 했다.

▶맥 영감을 통해 이중섭은 세계 정상 현대 미술관 MoMA에 들어간 첫 한국인 화가가 됐다. MoMA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이중섭 은지화를 "예술성뿐 아니라 소재 사용과 작가의 창의성으로 봐서도 실로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자기 작품이 MoMA에 소장된 것을 모른 채 세상을 떴다. 대구 전시 이후 이중섭의 건강은 날로 나빠졌다. 친구들에게 "내 그림들을 아궁이에 태워라"든가, "우물에 처넣어라"고 하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그는 외로움과 궁핍, 좌절에 몸부림치다 1년 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MoMA에서 온 은지화는 덕수궁 현대미술관 1층에 석 점 나란히 전시돼 있다. 그중 하나가 '도원―낙원의 가족'이다. 활짝 핀 꽃과 싱싱한 이파리들 사이로 복숭아가 탐스럽게 열렸고 아이들이 뒹군다. 콧수염을 한 남자가 유난히 잘생긴 복숭아를 알몸 여인에게 선사하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진 이중섭이 꿈에도 그리던 낙원이 이런 것이었으리라. 아쉽게 간 천재 화가의 일생을 담은 전시회가 두 순수한 영혼이 만나 남긴 흔적 덕분에 더욱 빛나고 있었다.